스코틀랜드 여행단상(1) - 포트 윌리암

스코틀랜드 여행 단상 (1) - 2015. 5. 30. 포트 윌리암

에딘버러를 출발하여 글렌코 산맥을 넘어 오면서 이미 각오하였지만, 이 곳은 이제까지 살아온 ‘그곳’과는 완전히 다른 땅이다.



글렌코 산맥을 넘어오는 길에 자동차도 힘겨운 듯 떵떵 소리를 낸다.

글렌코 산맥의 작은 등성어리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그 숨막히는 광경을 헐떡이며 호흡해보았다. 이곳엔 산과 계곡이 있고, 계곡마다 물이 넘쳐 흐르지만, 나무도 숲도 없다. 목마름은 없지만 숨막힘은 광활하다. 그 숨막힘 속에서 몇몇 식물군들이 땅에 착 엎드린 채 엉겨붙어 있다. 숨막힘 속에서도 파란 이파리로 희망을 깃발처럼 달아놓으려 하면, 양떼와 소떼가 그 희망을 나눠먹은 곳, 이곳은 하이랜드다.

하이랜드의 입구에서 마주친 글렌코 산맥은 거센 바람에 징징 소리를 내며 떠는 안내판처럼 단호한 어투로 이 곳에서 하이랜드가 시작된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글렌코 산맥을 넘어 하루 묵을 곳을 찾아 자동차를 세우고 짐을 옮긴 곳은, 지붕에 난 두 개의 창이 에일 호(Loch Eil)로 이어지는 곳이다. 오래 전부터, 그 바람소리에 자고, 꿈꾸고,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잠을 깨고 싶었던 그런 곳이다.

창 밖으로 호수를 보고 있노라면, 오랜 시간이 손에 닿을 듯이 느껴진다. 시간을 만지면서 세월을 느껴볼 수 있는 곳.

저 호수의 수면 아래엔 빙하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빼곡이 색색의 흙빛깔로 새겨져 있으리라. 바람이 흩날리기라도 하면, 장구한 세월의 무게로 힘들게 파르르 떠는 게 느껴진다.

이런 상상을 한껏 돋구는 것은 호수의 물빛이다. 마침 난 해에 비치는 에일 호는 빙하호가 늘 그러하듯 맑은 우윳빛 푸르름이다.

그 숙박지를 운영하는 부부는 뜻밖에 수줍음 많은 남편과 억척스런 아내다. 수수한 눈빛이 편안함을 준다. 주인 아줌마가 추천해준 부둣가 해산물식당으로 걸어갔다. 대구, 홍합, 오징어 요리와 백포도주 한 병을 주문했다. 해산물 요리가 맛깔나고 포도주 역시 맛있었다.

늘 생각해왔던 것처럼, 맛이란 고통 가운데 삶을 갈무리하는 가운데 맺혀지는 것이다. 물기라고는 잡아두지 못하는 성긴 석회암 토질에 뿌리내린 채 햇빛을 한껏 움켜쥐고 재생을 꿈꾸는 포도나무에서 비로소 포도주의 참맛이 난다. 차가운 북대서양 바람은 대구와 홍합, 오징어 같은 생명체에게도 일상의 고통을 강요하였으리라. 그 고통 속에서 살아온 생명력은 누구에게나 영감을 주는 것이다.

포트 월리암 부두의 해산물식당 유리창에 강한 호수바람이 몰아친다.

이젠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자며 떠나온 여행이다.
식당 밖의 스코틀랜드 깃발이 찢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강한 바람이지만, 포도주와 해산물로 지핀 식당 내 온기에 입고 있던 잠바와 윗옷을 하나씩 벗었다.

불어오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억센 악수와 같은 것이리라. 이곳에 잘 왔다고 아귀차게 잡아진 손을 흔드는 스코틀랜드인의 치마가 느껴질 정도다.
포트 윌리암의 키큰 스코틀랜드인이 우윳빛 푸르른 눈빛으로 큰 막대에 깃발을 흔들며 먼 이방인을 환영하다가, 벌떡 일어나, 별안간 가슴 깊이 푹 껴안고,


마음을 내려놓으세요, 평화를 바랍니다라고 따라 해보세요, 포도주를 한 잔 들이켜 보세요, 홍합국물에 빵을 적셔 먹고 편안히 잠들어 보세요, 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