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그늘에 누워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을 옮겨 적습니다)

쇠미산 梧桐나무 그늘에 누워
(2011. 5. 씀)

社稷 雙龍 藝家로 이사를 간 지 이제 2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동네 이름이 좋다. 社稷洞은 古來로부터 백성의 복을 기원하며 제사하는 국토의 신인 社와 곡물의 신인 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아파트 이름 藝家도 좋다. 藝는 본디 심는다는 뜻에서 유래한 한자로 고대 동양에서 인격을 도야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필요한 기초 교양의 씨를 심는다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쇠미산의 이름은 이어지는 산줄기가 소꼬리 모양 같다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사하기 전에는 자주 코(미간부분)이 묵직하고 두통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사한 뒤 훨씬 좋아졌습니다. 두통이 사라지니 아내가 제일 좋아합니다.

이사한 뒤 토요일, 일요일에는 주로 집 뒤의 쇠미산을 오릅니다. 쇠미산 이곳 저곳을 이런 저런 코스로 산행하고, 그늘이 아늑한 곳을 찾아 오랫동안 산속에 누워 있곤 합니다. 아내의 말을 들으면, 내가 산속에 누워서 코를 골면서 잔다고 합니다. 나는 산에 누워 눈을 감은 채 뜨오르는 생각의 끈을 잡고 이리 저리 공상의 나래를 펴고 즐기다가 일어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잠이 들곤 하는가 봅니다.

쇠미산을 오르다 보면 수령이 40~50년은 된 듯한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요즘 오동나무는 주렁주렁 보랏빛 꽃술로 화려합니다. 멀리서도 향기가 감미롭습니다.



쇠미산을 오르다가 산길을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오동나무 아래로 찾아갑니다. 기대어 서 있기도 하고, 안아도 보면서 오랫동안 오동나무 소리에 귀기울이곤 합니다.
오동나무가 하는 말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면경처럼 조용하고 깨끗하게 가라앉아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 지조차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제서야 조용하고 아늑하게 읖조리는 듯한 소리, 그걸 알아채고 집중해야 합니다.

어쩌면 내가 듣는 오동나무의 소리는 환청일 수도 있습니다. 그 소리는 정작 오동나무의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뜨오르는 나의 음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그것이 나무가 내게 이르는 말이라 여기고, 의심 없이 그 소리에 귀기울입니다.

오동나무는 특히 곡절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 정이 갑니다. 

옛날부터 딸을 낳으면 집가에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를 심는다고 합니다.

오동나무는 성장이 빠른 나무여서 대략 15년 ~ 20년이면 키가 7~8미터에 이를 정도로 성장합니다. 오동나무를 심으면 집이 샘물이 달아진다고 하고, 딸이 성장해서 출가할 무렵에는 그 오동나무를 베어서 반닫이 옷장을 짜서 살림살이를 마련해 보냈다고 합니다.
베어낸 오동나무는 결이 반듯하고, 맑으며, 오랜세월 동안 뒤틀리지 않기 때문에 세간으로 맞춤하기에 제격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오동나무가 인가 주변에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산속에 한 두 그루가 보이거나, 영주 부석사 가는 길의 소쇄원 같은 서원이나 정자 주변, 사대부의 옛집터에서 찾아볼 수 있고, 절집 주변에 겨우 몇 그루 있을 뿐입니다. 

지난 일요일에 찾아간 영주 소쇄원에도 오동나무 꽃이 한창이었습니다. 소쇄원에 있는 "대봉대"에서 한참동안 그 향기에 취해 보았습니다. 



 사찰 중에는 "오동나무 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는 가람"이라는 뜻을 가진 팔공산 동화사가 유명합니다.
동화사의 일주문은 그 이름이 봉황문입니다. 동화사 봉황문을 지나면 봉서루가 있고, 봉황알이라고 설명을 붙인 둥근 돌 3개가 있습니다.



동양에서 오동나무는 참으로 귀한 나무로 여겨왔습니다.
- 추수(秋水)편에, 봉황(鳳凰)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삼천년에 한번 피는 대나무 열매(竹實)가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예천(醴川, 중국에서 태평할 때 단물이 솟아난다고 하는 샘물)이 아니면 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봉황이 깃드는 곳에서 군자가 나고, 군자가 나는 시절은 태평세월이 된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집 주변에 오동나무 심기를 좋아했습니다.


봉황은 실제하는 동물이 아니며, 전설의 동물입니다. 용과 학 사이에서 봉황이 태어난다고 하고, 중국의 에 의하면, 봉황에 대하여 앞모습은 기린, 뒷모습은 사슴,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등은 거북, 턱은 제비, 부리는 닭을 닮았다고 합니다. 오색의 깃털을 지니고 울음소리는 5음으로 된 묘한 음색을 낸다고 합니다. 

봉황은 중국 한나라 시대부터 궁전이나 사찰의 전각에 그림이나 조각, 문양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는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봉황을 신성시 하는 관념이 함께 유래되었다고 추측됩니다.





경주에 있는 서봉총에서 발견된 왕관의 새도 봉황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돌무덤인 사신총에 그려진 朱雀은 봉황과는 다르나 대체로 “天鳥”사상의 구현인 점에서 비슷한 유래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구려 사신총을 실제 크기로 재현한 특별관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 특별관은 몇 개월간 공개했다가 다시 문을 닫고 다른 특별관으로 사용하였다가 다시 고구려 사신총으로 개관하고 있습니다. 요즘 제가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가는 때는 바로 사신총 특별관을 여는 때이고, 벌써 4차례 가량 사신총 특별관에 갔습니다. 사신총의 현무, 주작, 백호, 청룡 벽화가 주는 아름다움의 너비와 깊이를 온전히 제가 받아들이고 그 엄청난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중섭의 봉황도도 좋습니다. "봉황"에서 봉은 숫새를, 황은 암새를 말하며, 한번 인연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항시 같이 붙어 다닌다고 합니다. 



일본에도 봉황, 오동나무에 대한 신화가 전래되었는데,
일본에 있는 많은 문장(紋裝) 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문장은 바로 오동나무 문장입니다. 흔히 57桐鈫이라고 하며, 오동나무 열매가 다섯 개, 일곱 개 그려진 것을 말합니다.
남아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화의 윗옷 양쪽 가슴에 57동문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1300년도의 일본에선 천황이 전국적인 통제를 하지 못하였고, 아시카가 가문의 무사인 다카우지가 반란을 일으켜 천황을 진압하고 추종자들과 함께 가마쿠라 정권(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190년경 개창한 막부정권입니다)을 무너뜨려 천황을 교토로 내몰고, 고묘 천황을 옹립한 후 스스로 쇼군이라고 칭하고 무로마치 막부시대를 열었는데, 당시 천황이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오동나무 문장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 오동나무 문장은 쇼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이어져 갔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천황은 국화문양으로, 내각은 오동나무 문양을 사용합니다.


우리나라는 1967년부터 대통령 표장으로 봉황무늬를 사용하였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후 봉황무늬 표장이 국민가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를 폐지하겠다고 하여 한동안 사용하지 않다가 숭례문 화재사건 이후 “봉황의 저주”라는 말이 있은 후 다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봉황문이나 오동나무 문양은, 원래 황제만이 용의 문양을 사용하고, 주변의 왕들은 봉황문을 사용토록 한 중화사상의 흔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대한제국이라고 국명을 정하고, 황제라고 칭한 후 근전정에 처음으로 용문양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근정전 천장의 용은 발톱이 7개인데, 발톱이 5개인 용은 중국에서만 사용되고 주변 제후국은 발톱이 4개인 용그림을 사용하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근정전의 용그림은 당시 대한제국의 위상에 대한 절박하고도 대담한 외침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찾아간 일본 교토에서 본 용그림에서는 발톱이 5개였던 것이 기억납니다.) 



일본에서 유래되어 우리나라에서 더욱 사랑받는 “화투”에서 이른바 “똥”이라고 하는 화투그림은 바로 오동나무와 봉황을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 “똥광”을 보면 오동나무 잎이 아랫쪽에 묘사되어 있고, 그 위로 오동나무 열매가 있으며, 봉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일본에서 사용된 전통적인 화투 그림을 보면, 채색이 제대로 되어 있어 오동나무 잎, 열매, 봉황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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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미산의 오동나무에서 시작해서 얘기가 한참 빗나간 것 같습니다.

오동나무는 원산지가 한국이며, 평안도의 것과 울륻도의 것이 있다고 합니다. 병자호란 후 오랑캐들은 우리나라에 엄청난 공물 제공을 요구하였는데, 그때 오동나무 기름 10만근을 요구하였습니다. 오동나무 기름을 나무에 바르면 나무가 썩지 않고 갈라지지 않으며, 사람이 먹거나 바르면 설사나 피부병을 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오동나무가 많이 베어져 없어졌다고 하는데, 요즘은 참 보기 힙듭니다.

쇠미산을 오르다가 오동나무 그늘에 누우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봉황, 대나무, 사무라이, 도요도미 히데요시, 가마쿠라 막부, 오사카의 성, 교토에서 묵었던 료칸, 료칸 앞의 매화나무, 매화향 .... 아내가 걱정스럽게 묻습니다. 여보, 당신 또 잠들었어요? 코를 골고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 오동나무 꽃 향기가 절정입니다. 행복하게 다시 산을 내려옵니다. 세간이 번잡해도 생각은 늘 상상 속에서 편안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