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은 경주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 형태로 축조되고 그 내부에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보살상(문수, 보현보살, 11면관음보살), 천인상(범천, 제석천), 제자상이 있고, 입구(扉道)에는 아ㆍ홈 금강역사상, 사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석굴암에는 10개의 감실(龕室)이 있으며, 감실에는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문수보살상과 함께 유마거사상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감실 조각상 중 "유마거사상"은 석굴암 본존상의 뒤편 11면관음보살상을 마주 보는 위치에서 왼쪽으로 첫 번째 감실에 모셔져 있으며, 조각상의 높이는 95cm 정도입니다.
"유마(또는 유마힐)"거사는 대승경전인 유마경의 주인공이며, 바이샬리 성(城)의 장자(長者) "비말라키르티" 입니다. 유마경은 기원 전후에 성립된 것으로 3세기경에 중국어로 처음 번역되었다고 하며, 그 상(像)도 중국에서 처음으로 창안되어 고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유마경은 문수보살이 병상의 재가신도(在家信徒)인 유마(힐)거사를 병문안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유마거사는 문수보살과 함께 방문한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대승불교의 진리인 공(空) 사상에 대하여 특이한 방법으로 설파합니다.
즉, 두개의 상반된 개념을 조화시킴으로써 현실의 대긍정을 단호히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불이(不二)의 논리입니다.
번뇌가 곧 진정한 깨달음이며, 생사의 고통이야말로 곧 열반인 것이고, 깨달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나 언설(言說)과 문자야말로 그 모두가 깨달음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모순의 대긍정입니다.
유마경을 통하여 설하기를,
"모든 것은 그와 같아서 있는 것도,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보살이 죄를 과보(果報)로 받은 미(迷)한 세계(非道)에 간다면, 곧 부처님의 깨달음에 다다른 것입니다. 번뇌가 없는 경계를 알면서도 온갖 번뇌를 끊어 버리지 않으며 ...... 생사와 깨달음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사 그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면 생사는 이미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람을 결박하는 것은 없고, 그로부터 벗어날 필요도 없습니다. 또 고뇌로 인하여 몸을 태울 일이 없으므로 그것을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이같이 깨닫는 것이 절대 평등한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모순의 조화라는 유마의 방법은 중도(中道)의 참뜻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하여지고, 대승불교가 꽃핀 중국에 이르러 많은 선승들이 유마경을 더욱 귀하게 여기게 된 까닭입니다.
역설로 가득 차 있으며 양단(兩斷)을 여윈 중도와 화해를 통하여 부처의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전하는 이 방법은, 불이(不二)법문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역설로 가득 차 있으며 양단(兩斷)을 여윈 중도와 화해를 통하여 부처의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전하는 이 방법은, 불이(不二)법문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문수보살이 불이(不二)에 대한 제자들의 물음에 대하여,
"일체의 법이 있어 이 법은 말할 것도 없고 더 이상 설(說)할 것도 없고, 보여줄 것도, 아는 것도 없이 모든 문답을 떠난 자리, 이것이 불이의 법문에 드는 길이다"라고 말하고 마지막으로 유마에게 이를 물은 데 대하여, 유마는 오직 침묵으로서 답합니다.
문수보살은, "훌륭하도다, 문자도 언어도 전혀 없도다. 이것이야말로 절대 평등한 경지에 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무언(無言)은 후세에 '유마일묵 여만뢰'(維摩一默 如萬雷)의 법문이라고 불리어졌습니다.
석굴암 감실의 "유마상"은 유독 거칠게 다듬어져 있어, 다른 감실의 조각상들이 모두 정성을 들여 잘 다듬어진 청정한 것과 비교됩니다. 왜 신라의 조각자는 이 "유마상"만을 이렇게 거칠게 만들고는 내버려 두었던 것일까요 ?
얼굴은 약간 들어 허공을 응시하는 듯하고, 눈꼬리가 쳐져 어쩐지 병약해 보입니다. 뭔가 어렵게 말을 하다가 그만 둔 듯한 느낌입니다. 머리 두건의 앞 마무리도 약간 어색하게 보입니다. 이런 형태는 전체적으로 얼굴을 향한 쪽으로 마음을 다해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듯한 인상을 주고자 의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른팔은 팔걸이에 기댄 채 손을 내려 제법 큰 부채모양의 먼지떨이(塵尾, 청정한 먼지떨이)를 들고 있으며,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왼쪽 다리는 옷에 가려져 있습니다. 얼굴표정은 간략하게 처리되었지만 비교적 풍만한 편이며, 눈을 크게 뜨고 앞을 응시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약간 큰 눈과 뭉툭한 코는 입모습과 함께 전체적으로 찡그리며 고통을 참는 느낌을 주고, 어깨를 뒤로 치켜 올려 목을 약간 움츠린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전체적으로 강렬한 느낌을 전해 줍니다.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조금도 해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신라의 조각가는 유마경에서 불이의 법문을 설하는 절정의 유마거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포착하여 표현하고자 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모습은 병문안을 온 문수보살과 마주 앉아 무언(無言)의 법문을 설하는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고 느끼곤 합니다.
때로 어떤 이들은 석굴암 감실의 다른 조각상들은 모두 섬세하게 조각된 것에 비하여 유마상만이 유독 세련되지 못하고 비교적 거칠게 작업이 종료된 형상에 미루어 보아, 이것은 채 완성되지 아니한 미완성의 조각상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 유마상은 감실의 다른 조각상들이 조각될 당시에는 만들어지지 아니한 것이고 훨씬 후대에 거친 솜씨의 조각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마상의 신체부분은 그처럼 미완성인 듯이 거칠게 마무리되어 있지만, 조각상의 아래에는 분명하게 안상(眼像)의 무늬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 것에 미루어 보면, 조각하다가 미처 완성되지 못한 채 작업을 중단하였다거나, 후대에 따로 만들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석굴암에는 석가여래상을 둘러싸고 벽체에 12제자상이 부조되어 있는데, 이 12제자상은 아함경 이래 다른 경전에서는 그 이름을 알 수 없고 오로지 유마경에서만 12제자가 차례로 이름이 거명되며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 미루어 보아도, 석굴암의 건축을 기획한 당시 신라인들은 유마경을 중요한 소이(所以) 경전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이므로, 석굴암에서 유마거사상을 가볍게 처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여 보면, 석굴암 감실의 유마거사상은 지금 보이는 그대로가 신라인들의 석굴암 축조의도를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점에 미루어 보아도, 석굴암의 건축을 기획한 당시 신라인들은 유마경을 중요한 소이(所以) 경전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이므로, 석굴암에서 유마거사상을 가볍게 처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여 보면, 석굴암 감실의 유마거사상은 지금 보이는 그대로가 신라인들의 석굴암 축조의도를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신라인들은 진정한 유마거사의 모습을 돌에 새기기 위하여, 여러 번의 만족치 못한 작업들을 거치면서 다양한 모습을 조각해보고, 거듭해서 조각상을 부수어 버리고, 또 새로이 조각상을 만드는 오랜 신고(辛苦) 끝에, 마침내 이처럼 거친 모습의 유마상을 통하여 진정한 유마거사의 모습을 찾아냈을 것입니다.
이는 중국에서 여러 구의 유마거사상이 발견되고 그 조각상들이 모두 구체적 형상을 띄고 있는 것과도 비교됩니다.
이는 중국에서 여러 구의 유마거사상이 발견되고 그 조각상들이 모두 구체적 형상을 띄고 있는 것과도 비교됩니다.
도이치의 미술사가 빌헬름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 이입'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인간의 예술적 본능은 본래부터 추상의 표현에 있고, 그것이 감정이입을 통한 구체적 구상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석굴암 유마거사상은 감정이입을 극도로 절제한 가운데 유마경의 극적인 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추상과 구상의 치밀한 조화를 통한 조형예술의 완성미를 보여주는 것이지, 미완성이라거나 거친 졸작이라고 할 수는 않습니다.
석굴암 유마거사상은 감정이입을 극도로 절제한 가운데 유마경의 극적인 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추상과 구상의 치밀한 조화를 통한 조형예술의 완성미를 보여주는 것이지, 미완성이라거나 거친 졸작이라고 할 수는 않습니다.
저는 석굴암의 유마상을 보면서,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이 대좌한 모습을 상상하며, 유마거사가 설파한 불이(不二)의 법문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하면, 유마상을 조각한 신라의 신앙인도 유마거사에 대한 한량없는 그리움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청정한 마음의 거울에 조용히 떠오르는 유마의 모습을 거짓 없이 그려내려 하였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석굴암의 유마상은 이렇듯 미완의 모습인 듯한 그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완성된 유마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미완을 통하여 궁극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불이(不二)의 법문을 설파하는 무언(無言)의 유마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이러한 방법 외에 달리 어떻게 무언(無言)으로써 불이(不二) 법문을 설한 유마상을 조각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석굴암의 유마상은 이렇듯 미완의 모습인 듯한 그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완성된 유마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미완을 통하여 궁극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불이(不二)의 법문을 설파하는 무언(無言)의 유마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이러한 방법 외에 달리 어떻게 무언(無言)으로써 불이(不二) 법문을 설한 유마상을 조각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석굴암 감실의 "유마상" 이것 또한 석굴암의 여러 조각상과 함께 선인들의 신앙심과 미적 감각의 극치를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조각상을 잘 볼 수 없으나, 후손들이 끊임없이 친견을 소원하고, 마음의 티끌들을 가라앉혀 간다면, 스스로 청정한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리라 믿습니다.
석굴암의 유마거사상은 저에게 위대한 위안이며, 뜨거운 소망을 줍니다. 삶의 절망과 두려움, 헛된 고집은 혼탁하여 병든 것일 뿐 그것이 바로 청정한 본래의 모습(如來)과 둘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고 깨우쳐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