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미술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이라는 주제로 한국와 일본의 민예품 전시를 하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미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사라지려고 하는 한 조선건축물을 위하여'라는 글로 유명해져 있다.
그러나, 나는 일찌기 야나기 무네요시가 영국의 시인 윌리암 블레이크을 통해서 밝힌 아름다움에 관한 글에 감탄한바 있고, 그가 쓴 석굴사 방문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출처 : 일민미술관, 1910년대에 해인사를 찾은 야나기가 해인사 앞마당의 석탑에 서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종교적, 미학 사상 중 하나는 '美神一如'의 사상이다.
그가 1910년에 쓴 '새로운 과학(하)'의 글을 보면,
'이른바, 물질현상의 세계는 가상의 세계이다. 참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상징이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보거나, 추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
이미 이 세계의 참모습은 물질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는, 물질에 종속될만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는 우리들 자신의 관념 내부에 존재한다.
우리는 자기 신념에 기인해서 이 세상에 변치 않게 할 힘을 부여받고 있다.
세계는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으므로 소위, 물질세계는 우리들이 짐작함으로써 비로소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마음의 주인이고, 그들이 손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인생관은 유심론이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상징이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보거나, 추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
이미 이 세계의 참모습은 물질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는, 물질에 종속될만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는 우리들 자신의 관념 내부에 존재한다.
우리는 자기 신념에 기인해서 이 세상에 변치 않게 할 힘을 부여받고 있다.
세계는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으므로 소위, 물질세계는 우리들이 짐작함으로써 비로소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마음의 주인이고, 그들이 손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인생관은 유심론이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야나기는 종교, 철학 및 과학이 융합된 현실적 유일의 최종점으로써 '새로운 과학'을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로 인식한다.
즉, 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에 우주의 영혼인'신'이 내재하고, 이를 '신'이라는 표현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을 인간들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자연물질로부터는 언제나 내재된 '신'이 출현하여 진리를 가르쳐 주는데,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는 감정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신과 아름다움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神美一如). 이는 아름다움에 관한 가장 고상한 표현의 하나로 보여진다.
우리를 멀리 뉴질랜드까지 다녀오게 한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 속에 있는 그 무엇이 멀고먼 그곳까지 다녀오게 하였을까.
그곳의 설경과 호수의 아찔한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 마음에 남았고, 그 남은 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전시를 보면서 조금씩 해소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뉴질랜드 볼패스 트렉킹을 통하여 기쁨과 아름다움을 맛보았고, 그 기쁨과 아름다움이란 다름아닌 우리 속에 내재한 본질적인 우리 자신에 맞닿았을 때의 기쁨과 환희의 감정에 다름아닌 것이다.
숨겨진 참된 것을 맛보는 것, 그것은 기쁨과 아름다움이라고 표현되었고, 갈망의 해소였다.
숨겨진 참된 것을 맛보는 것, 그것은 기쁨과 아름다움이라고 표현되었고, 갈망의 해소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주변의 버려진 듯한 민예품(민간공예품)인 소반, 옷장, 소쿠리에서 발견하였고, 일생동안 그것을 모았다.
일민미술관은 그간 야나기 무네요시가 모았던 민예품을 잘 전시해두었다.
아이들도 제 아비가 시간을 들여 소반을 이리저리 살피고, 설명을 읽고, 간간이 전시품 사이에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을 보고, 하품을 하면서도 전시품을 이런 자세 저런 자세로 자세히 살펴본다.
일민미술관은 그간 야나기 무네요시가 모았던 민예품을 잘 전시해두었다.
아이들도 제 아비가 시간을 들여 소반을 이리저리 살피고, 설명을 읽고, 간간이 전시품 사이에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을 보고, 하품을 하면서도 전시품을 이런 자세 저런 자세로 자세히 살펴본다.
야나기의 무유호추(無有好醜)라는 글씨 앞에서 오랫동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마치 마운틴 쿡의 달빛 아래 앉아 영원히 그렇게 앉아있고 싶었던 것처럼.
없음, 있음, 좋음, 나쁨. (無有好醜)
(짐작해보건대)
있음(有)이란 없는 것(無)이요, 이는 추함(醜)을 좋아함(好)과 같은 것이리.
(다시 짐작해보건대)
무릇 마음에 가득한 온갖 유(有)한 것이 사라지니(無), 이리도 추(醜)한 것마저 좋아짐(好)이여.
(또 짐작해보건대)
마음을 비워 깨끗해지니(無) 만물이 모두 아름답고(好), 마음이 채워져 혼탁하니(有) 그 또한 추하여지는구나(醜).
우리가 멀리 뉴질랜드를 가고, 눈덮힌 마운틴 쿡을 넘고자 하였던 것은,
우리가 멀리 뉴질랜드를 가고, 눈덮힌 마운틴 쿡을 넘고자 하였던 것은,
아름다움을 보고 느낌으로써 저절로 있는 마음의 맑고 깨끗함을 다시 한 번 보고, 느끼고자 하였으리라. 그 산하의 아름다움에 깊게 감탄하였으나, 그것은 우리네 마음에 고요있는 맑음에 손이 닿아 비로소 희열을 맛본 것이리라. 야나기는 글씨는 그렇게 일러주었다.
이번에 다녀온 뉴질랜드 트렉킹(볼패스 트렉킹)에서 본 멋진 풍광도 일민미술관의 민예품도 내게는 모두 소중한 매개물이었다.
'신'을 알고, 아름다움을 알고, 그를 통하여 기쁨을 느끼고, 열광하고,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마침내 그런 그 무엇없이도,
그 무엇있는 것과 아무런 차이 없이,
오직 아름다우며, 기쁘며, 열광하며, 행복할 수 있을 터이니까.
아름다운 뉴질랜드에서의 기쁜 산행과 여행.
이제는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 행복한 추억은 오랫동안 남아 그 달콤함을 안겨주리라.
마침내 맑고 아름다워 스스로 있음과 없음을 가리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