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여행 단상 (4) - 인버네스(Inverness)

스코틀랜드 여행 단상 (4) - 인버네스(Inverness)

2014년 말부터, 새해에는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기독교 성경을 차근히 읽기로 마음먹었다. 1월 중순이 되고서야,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구나 생각하고 서둘러 신약성경의 요한복음부터 읽기 시작했다(요한복음부터 읽는 것이 좋다는 추천을 여러 번 받은 탓이다).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예수에 대한 말씀을 전해준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면서 멀리서 다가오는 예수를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라고 경탄하였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 안드레아는 스승의 경탄을 듣고 깜짝 놀란다.
이튿날 아침, 안드레아는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고, 예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다. 요한복음의 저자)과 함께 다시 지나가는 예수를 보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스승으로부터 예수가 약속된 구세주인 메시아라는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예수에 대하여 강한 호기심과 이끌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참 가다가 마침내 예수가 뒤를 돌아보며 무슨 일로 따라오느냐고 묻자, 안드레아와 요한은 “선생님이 묵고 계신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와서 보라고 하면서 그들을 데리고 숙소로 갔고, 그 두 사람을 제자로 선택하였다.
안드레아는 그렇게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공적으로 인정된 성서에 사도 안드레아에 대하여 언급이 된 것은 많지 않다.
안드레아는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계의 종말이 언제 일어나는지 예수에게 질문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또 오병이어(五餅二魚, Five loaves of bread and two fishes)의 기적을 행할 때 그 빵과 물고기를 가진 소년을 예수에게 데리고 온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 며칠 전 예수를 만나고자 찾아온 이방인(그리스인)을 필립보와 함께 예수에게 데려온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사도 안드레아의 모습도 흥미롭다.
그림에는 오늘 밤 이 곳에서 만찬을 나누는 제자 중의 한 명이 다음 날 스승(예수)을 제사장들에게 고발하여 팔아먹을 것이라는 스승(예수)의 말씀을 듣고 놀라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사도 안드레아는 손바닥을 내보이면서 두 손을 굽혀서 들고 있는 모습이다. 강하게 부정하는 모습이 꼭 다문 입으로 표현되어 있다.


공적으로 인정되지 아니한 경전 ‘사도 안드레아 행전’과 초기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사도 안드레아는 성령 강림 사건 이후 다른 사도들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탈옥하여 곧장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다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한다. 안드레아는 성전에서 다시 체포되어 법정에 끌려가 심한 매질을 당한 뒤 풀려났고, 그는 러시아 남부 및 그리스 북부지방인 에피루스 등지에서 선교를 계속하였다.

사도 안드레아는 기원후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 때에는 마케도니아 이남 아카이아(현재의 그리스 남부)지역에서 선교를 하다가 파트라스 시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안드레아의 유해 관리자였던 레굴루스는 꿈에서 천사의 지시를 받고, 사도 안드레아의 유해 일부를 가지고 스코틀랜드 지방으로 가서 30여 년 동안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곳에 성 안드레아 수도원을 설립하였다고 한다.

사도 안드레아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Patron Saint)이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 당시부터 스코틀랜드인들은 출정하는 십자군들에게 신의 가호를 빌면서 푸른 바탕에 흰 색의 X자를 그린 깃발을 선물하였다고 하고, 이것은 스코틀랜드 국기인 성 안드레아 깃발이 되었다.
십자군 전쟁 출정 때 잉글랜드는 흰색 바탕에 붉은 십자가를 그려 넣은 성 조지 깃발을 사용하고, 아이랜드는 흰색 바탕에 붉은 X자를 그려 넣은 성 패트릭 깃발을 사용하는 점에서 재미있는 대조가 된다. 이 세 깃발을 깃발 하나에 그려넣은 것이 유니언 잭이라고 한다.


스카이 섬을 떠나 자동차로 A87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려가니 네스 호수가 나온다. 괴수를 본 이들도 있다고 해서 네스 호 수면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곧장 A82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내달려 도로가 바다를 만나 멈춘 곳에 하이랜드의 주도(Capital of High Land) 인버네스가 있었다. 도시 입구 안내판에 네스 강 입구도시(Mouth of River Ness)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인버네스는 인구 55,000명 정도의 아담한 소도시다.
그곳에서의 이튿날, 현재 법원으로 사용되는 인버네스 성채 주변과 네스강 변을 걸어 보았다. 성채는 작은 언덕 위에 있었지만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네스 강은 검푸른 빛의 풍부한 수량으로 흐르며 대서양으로 빨려들어갔다.

네스 강변을 걷다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강변 식당에 들렀다. 식당은 보기에도 깨끗하였는데, 마침 직원들이 외부와 내부를 청소하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주문하자 실내를 청소하던 직원은 빗질를 멈추고 따뜻한 홍차와 케익, 샌드위치를 내주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점심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애프터눈 티 정도의 식단만으로도 점심식사로 충분했던 탓이다.
네스 강변의 쌀쌀한 바람 속을 걷고 난 이후이기에 따뜻한 실내의 뜨거운 차와 달콤한 케익은 저절로 몸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입맛이 까다로움을 내세울 필요가 없어진 탓이리라. 가족들과 모국어의 안락함 속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방금 찍은 사진들을 나눠보면서 이런저런 기억을 뜨올려 보는 것 역시 케익에 꿀맛을 더해주는 듯 달콤하다.

그곳에서 스코틀랜드의 거센 바람도 멈추었고, 네스 강의 검푸른 빛깔이 내풍기는 음흉한 불안감도 잊혀졌다.
강 건너편에는 1860년대에 지어진 성 안드레아 대성당(St. Andrew's Cathedral of Inverness)이 있었다.



성당을 둘러보다가, 그 곳 벽에 모셔진 안드레아 성인의 그림앞 기도대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기도를 구체적 언어의 형태로 하지 않고 있다. 언어로 정리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듯 생각을 이어나가며, 그 지향을 기독(基督)에게 향하도록 했다.
무언어의 기도법에서 처음엔 마음의 지향을 따라 늘 구체화된 연상이 먼저 등장한다. 잔잔하게 마음이 가라앉으면 비로소 물상화된 연상을 떠날 수 있다.

먼저 김대건 안드레아가 생각났다. 김대건의 할아버지 김진후는 이미 1800년대초에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대건 안드레아는 그런 집안에서 충청도 솔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정하상의 도움으로 중국에서 들여온 책으로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만주, 요동을 거쳐 마카오에 도착하여 파리 외방선교회 동양경리부의 프랑스 선교사들로부터 직접 신학을 배웠다.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중국 어선을 타고 경기도 연평도로 입국하였다가 체포되어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아이들 외할아버지 대건 안드레아에게 생각이 이어졌다.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떠올렸다.

다음에는 작은 딸이 다니는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가 떠올랐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안드레아 성인을 기념하는 도시와 대학에서 새 공부를 시작하는 작은 딸에게 건강과 평화를 기원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인 안드레아와 감사만을 생각하였다.
감사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형상화된 물상으로 연상되지 않았고, 꿇어앉은 무릎의 따뜻함, 대성당 모자이크 창의 화려함, 성당 안 공기의 부드러운 움직임 같은 것들이 차례대로 느껴졌다. 어찌 보면, 작년부터 새롭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와 만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꿈을 몇 번 꾼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나는 이성(理性)이라는 타켓을 찾은 경우에만, 잘 했어요, 굵은 목소리의 칭찬과 함께 대가로 먹이감 한 조각이 튀어 나오는 실험장에서 살아온 것 같다. 문득, 내가 살아가는 이 곳은 실험장의 작은 박스가 아니라 더 큰 곳, 무지하게 큰 곳이어서 그 끝을 당장 알 수는 없는 곳, ‘무한’한 곳의 한 모퉁이라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 ‘무한’에 대한 절감의 순간은 막연한 것이어서 의심스럽고 두렵기도 했으나 예전의 것을 부정하기에는 충분했다. 둔탁하지만 강하고 길고 밝았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고 쓰여진 타켓을 찾지 않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실험자는 놀랐으리라. 실험장의 생쥐가 어느날 주저 앉아 더 이상 보상을 바라지 않고 굶주림을 자처하고 나선 광경을 기록하고 있으리라.
아마 그것이 신비와 감사를 몸서리치게 절감한 순간이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장 합리적 것”을 찾아내면 보상(땅콩)이 주어졌던 이제까지의 삶의 허상을 알아챘을 때, 나는 내가 아닌 새로운 그를 위로하는 방법부터 배워야 했다. 그 실험장에서 오래 살아온 탓으로 이미 신경줄이 낡고 헤져 심한 두통을 일상으로 달고 다니고 있었다. 작은 빛의 변화나 냄새의 변화만 있어도 즉시 신경줄을 헤집어 놓았고, 두통은 육신을 가볍게 내동이쳤다.

이제는 하루하루 예전의 그림자를 조금씩 지워나가야 한다. 주저 앉아 당황하는 그를 격려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삶이란 존재 그 자체에서 신비와 감사를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익혀나가야 한다.

인버네스 안드레아 대성당에 그려져 있는 안드레아 성인의 그림 앞에서, 내내 감사를 떠올렸다. 이런저런 영상들이 때로 머리를 채웠다 지나갔다 했지만 점차 밝은 무채색의 추상 속에 머물러 평안했고 따뜻했다.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이 외롭게 무릎 꿇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탓이리라.

대성당을 나와서 다시 보는 네스 강. 더물게 보는 밝은 미역색깔이었다. 미끈거리지만 부드럽고, 온 몸을 쓰다듬는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북위 58도의 초여름 태양은 비스듬이 입을 가리며 미소짓는 듯 했다.
고개를 들어 어디에서 이런 따뜻함이 오는가 살펴보니, 흰색 큰 갈매기 두어 마리가 높이 날고 있었다. 갈매기 콧등 색깔이 유난히 선명했다. 날개짓하지 않고 바람을 즐기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마치 내 몸마저 바람속에서 멀리 수평선을 보고 있는 듯 가볍게 뜨올랐다. 황홀감의 일종이다.

이리로 가요, 아이들이 인버네스 다리쪽으로 길을 재촉하며 제 아빠를 부른다.

큰 갈매기가 먼저 다리쪽으로 비행하며, 고개를 치켜든 채 길을 걷는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 본다. 앞을 봐, 앞을, 제대로 앞을 봐야지... 깜짝 놀라 보도의 작은 턱에 발걸음을 내딛으며, 참으로 신비롭군... 혼잣말을 했다.

저만치 인버네스 시내가 마치 부산집에 도착한 양 편안한 풍광으로 느껴졌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안드레아 성인은 이곳 사람들에게 평화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고, 인버네스는 내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