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관음전에서

K 형 !
다시 가을이 오고 산과 계곡은 오색단풍으로 아름답습니다.
형과 함께 마지막으로 거닐었던 불국사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때도 가을이었지요. 연락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와 경주나 같이 가 보자고 하여 야밤에 반월성을 걷고 달빛 아래 신비한 첨성대를 오랫동안 바라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후 형의 건강이 나쁘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그러다가 다시 좋아지겠거니 생각하고 무심히 지냈는데, 일전(日前)에 형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K 형 !
저는 요사이 살아가는 일에 지치거나 힘들다고 생각될 때면 늘 경주를 찾곤 합니다.
제가 경주에서 찾아보는 것은 고분(古墳)과 석불(石佛) 그리고 여러 유물들이지만, 정작 제가 경주를 그토록 탐닉하고 연연해하는 까닭은 경주에 오면 그곳에 산적해 있는 고분과 석불을 통하여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천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천년의 시간을 만지노라면, 진흙으로 태어나 티끌 되어 사라지는 하릴없는 생명에 대한 지극한 절망감도 한순간에 사그라지고, 오랜 시간 동안 생명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명상하였던 선인(先人)들의 깊은 음성을 통하여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의미와 환희를 배우게 되고, 마침내 마음 깊은 속으로부터 뜨거운 열기를 되찾곤 합니다.


K 형 !
형과 함께 찾았던 불국사의 가을밤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단풍으로 화려한 불국사의  전각(殿閣)과 석축(石築)은 진정한 아름다움의 원천을 일러주는 것 같았습니다. 
형이 떠난 후 저는 스잔한 초겨울이나 눈발이 아득한 한겨울에도 불국사를 찾아보곤 했습니다. 계절이 바뀌어도 불국사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스잔하여 외로운 초겨울에는 그리하여 더욱 불국사 좌경루(左經樓)가 아름답게 다가왔고, 눈발 아득한 한겨울에는 그리하여 더욱 석가탑 3층 탑신의 늘씬함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국사를 찾아보면서 저는 그곳을 처음으로 만들었던 이들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이곳을 건축하였던 이들은 무엇을 꿈꾸며, 무엇을 소원하였기에 이리도 아름다운 꿈을 이곳에 당우(堂宇)로써 세워 놓았을까요.
거듭해서 불국사를 찾으면서 저의 이런 의문은 더욱 깊어져 갔습니다.

K 형 !
불국사의 창건 시기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와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조금씩 달리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적과 고금창기에 의하면, 불국사는 법흥왕 15년(서기 528년)에 창건되고 경덕왕 대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중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후세의 잘못된 기록이라고 보여지고, 일연(一然)이 1046년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한 바와 같이,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년)에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그 완공을 보지 못한 채 774년에 세상을 떠나자 국가에서 이를 맡아 39년만에 완공하였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불국사의 창건연기 설화에 대하여, 삼국유사의 대성효이세부모조(大成孝二世父母條)에서는, 김대성이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의 아들일 쩍에 점개 스님이 흥륜사에서 베푸는 육륜회(六輪會)를 위한 시주를 하고, 그 날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고, 커서 재상이 되어 전생(前生) 부모인 경조를 위하여는 석굴암을 짓고, 현생(現生) 부모인 김문량을 위하여는 불국사를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김대성과 천년전 신라인들은 이곳에 가람(伽藍)을 세우고 그 이름을 불국사(佛國寺)라고 하였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들은 이곳에 불국(佛國) 즉 “부처님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불교의 주요 대승경전인 화엄경이나 법화경, 능엄경 등 여러 곳에서 불국(佛國) 또는 국토(國土)라는 용어가 사용되며, 그때마다 그 불국(佛國)이나 국토(國土)는 바로 “깨달은 바른 마음의 경지(正覺心)”를 상징하여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주 불국사 건축계획의 기본 의도는 추상적인 “깨달은 바른 마음의 경지”를 사찰 건축을 통하여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기본 의도는 불국사의 여러 건축물들의 배치, 석축과 석교의 설치 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되었습니다.

  즉, 대웅전, 극락전 등 주요 전각이 들어서 있는 곳을 떠받치는 높다란 석축(石築)을 쌓아 그 아래의 사바세계와 그 위의 부처님의 나라를 구분하였고, 사바세계에서 부처님 나라로 나아가기 위하여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여러 마음의 단계를 딛고 올라가야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의 여러 석교(石橋)를 두어 그곳을 통하여 석축 위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른 마음의 경지”는 아득한 자각(自覺)의 세계임과 동시에 지극한 타각(他覺)의 세계임을 상징하기 위하여, 사찰의 중앙에 대웅전을 두어 자각(自覺)을 상징하고, 대웅전의 서쪽 나란한 곳에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을 두어 타각(他覺)을 상징하였으며, 대웅전의 뒤편에는 동쪽으로 관음전을 두어 타각(他覺)을 상징하고, 그 서쪽으로 연이어 비로전을 두어 법신불로서의 자각(自覺)을 상징하였습니다. 이처럼 자각과 타각을 상징하는 전각을 서로 엇갈리면서 앞뒤, 좌우로 배치하여, “바른 깨달음”은 온전한 자각에 의하여 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지극한 신심(信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온전한 자각이란 바로 삼세제불(三世諸佛)에 대한 바른 신심(信心)을 바탕으로 하여야 달성 가능한 것이고,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도 그 상징하는 바 구원과 자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흔히 “바른 깨달음”은 모든 번뇌의 불을 꺼 버린 위대한 자각(大自覺)에 있는 것이고 아미타불을 신앙하거나 관세음보살에 의지하여 타력(他力)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방편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만, 진정한 깨달음은 오히려 자타(自他)의 구분이 없는 것으로서 온전한 자력에 의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거나 지극한 신심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구분될 수 있는 둘이 아니며(不二), 오히려 진정한 깨달음은 자타의 합일(自他合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화엄경의 노사나품(盧舍那品)에서도, 보현보살이 부처님 앞에서 연화장(蓮華藏)의 사자좌(獅子座)에 앉아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하여 ‘비로자사 부처님의 삼매(三昧)’에 들자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보현보살을 찬탄하며 노래하기를,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그대는 능히 이 삼매에 들었나니, 이것은 한결같이 비로자나불의 본원력(本願力)에 따르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 그대가 모든 부처님의 서원(誓願)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며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설(說)하신 진리를 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를 넓히기 위함이며, 또 일체 중생의 번뇌를 없애고 청정한 길을 얻게 하기 위함이며, 또 모든 부처님의 경계에 자유자재하게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합니다.
  즉, 보현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서원을 실천함과 동시에 비로자나불의 본원력에 따르고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하여 비로소 지극한 삼매에 들게 되어, 자력에 의한 보현보살의 실천과 타력에 의한 비로자나불의 원력(願力)이 합일된 경지에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으로 설(說)하여져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이처럼 “깨달은 바른 마음의 경지”는 자타합일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상징하기 위하여,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과 관음전을 의도적으로 대칭되며 엇갈리게 배치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불국사의 건축구도를 명상하고 거기에서 많은 가르침을 얻는 것이야말로 당시 신라인들이 후세의 참례객에게 주고자 했던 진정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K 형 !
저는 불국사에 많은 의문을 가지고 여러 차례 거듭해서 불국사를 찾아보고, 그곳에서 불국사 건축계획의 기본 의도를 비롯하여 대웅전 영역에서의 지할(地割)과 비례관계, 각 건축물의 상징과 그 상징을 표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건축기법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화엄(華嚴)과 법화(法華)의 수승한 공덕을 말하고자 하는 신라인들의 깊은 신앙을 느낄 수 있었고, 이러한 느낌은 불국사를 참배할 기회가 많아질수록 더욱 분명하여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요사이 제가 불국사에서 자주 찾는 곳은 대웅전 뒤편의 관음전입니다.
한때는 종일 대웅전의 묘한 마루바닥과 용마루 그리고 석가탑과 다보탑을 관찰하면서 신라인들이 선물하는 아름다움에 내내 행복하였던 적이 있었고, 또 한때는 극락전으로 내려가는 48계단을 오르내리며 아미타불의 48원(願)을 따라 염송하는 것만으로 행복하였던 적이 있습니다만, 요사이는 말없이 우뚝선 관음전 아래에서 관음보살의 자비함을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관음전에 올라 지극한 마음으로 참배하고 돌아오는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K 형 !
관음전에는 관세음(觀世音)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보통 관자재보살 또는 관음보살이라고도 불리어지며 그밖에도 불리어지는 용(用)과 소(所)에 따라 대비성자(大悲聖者), 시무외자(施無畏者), 원통대사(圓通大士), 남해대사(南海大士), 천광명(千光明) 등의 여러 이름이 있고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聖觀自在普薩一百八名經)”에는 관세음의 108종 이름이 범어 다라니(密敎의 呪文) 형태로 제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본 불경에는 이 보살을 가리켜 'Avalokitesvara'라고 하는데, 이는 ‘Avalokita’와 ‘isvara’로 구분되는 것으로, ‘Avalokita’는 ‘내려다본다’는 의미의 ‘avalokayati’의 과거분사형이고, ‘isvara’는 ‘다스리는 님’이라는 뜻입니다.
  즉, 그 이름의 본래의 뜻은 ‘내려다본 것을 다스리는 님’이라고 해석되며, 그 중에서 ‘내려다 본’을 ‘관(觀)’으로 하고, ‘다스리는 님’을 ‘자재(自在, 다스려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존재함)’라고 한역(漢譯)한 것은 대체적으로 보아 그 원뜻이 잘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처럼, 관자재보살의 본래의 뜻이 ‘내려다본 것을 다스리는 님’이라는 것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은 널리 애송되는 반야심경입니다.
  즉, 반야경의 핵심을 요약하는 반야심경은 그 첫머리를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거룩한 관자재보살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행하실 때 자세히 내려다보시니 다섯 가지 근간이 있는데, 그들은 자성이 모두 공함을 보셨느니라"
(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蜜多 時 照見五蘊皆空度 )
  이때 관자재보살은 다섯 가지 근간을 내려 비추어 보신 것으로도 해석되며, 위에서 살펴본 어원과 관련시켜 보면, 관자재보살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 근간(五蘊)을 내려다보고, 그 일체가 공(空)함을 보시고,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신 분으로서 다시 차안(此岸)에 돌아와 사리불에게 반야교설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내려다본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범어의 어원과도 일치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이처럼 ‘내려본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한역에서 관세음보살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주로 법화경 보문품 중 관자재보살의 공덕을 표현하면서 “즉시 그 음성을 보고(觀) 해탈시켜 준다”는 부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여지며, 일부 범어 경전(1927년 동파키스탄에서 발굴된 梵語古寫本斷簡) 등에서 관음보살을 가리켜 'avalokita(내려다본) - svara(소리)'는 표현이 발견되므로 이것에서 "관세음보살"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한편, 법화경 보문품에서 관음보살은 중생들이 큰 불이나 홍수, 태풍, 귀신, 도적을 만나는 등 큰 환난에 빠졌을 때 진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부처, 벽지불, 범왕, 제석천, 자재천, 장자, 거사, 비구, 천, 용, 집금강 등 19응신(應身)으로 즉시 몸을 나투어 환난에서 구원하여 준다고 하며, 능엄경은 이에 다시 가감, 부연하여 32응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또, 관음보살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신앙되기도 했는데, 인도의 신화에서 유래한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이나 불공견색관음(不空絹索觀音) 등이 그것이고,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는 양류(楊柳), 용두(龍頭), 백의(白衣), 수월(水月), 어람(漁藍) 관음 등으로 분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관세음보살 친히, 저마다 살고 있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중생들이 달리 믿어 온 구원자상(像)을 받아 입은 것으로서,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에 있어서도 한계적인 중생들이 손쉽게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믿고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신앙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밀교 계통에서는,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천수경에서 관음보살의 영험(靈驗)과 신앙을 강조하고, 천수경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대비심다라니’에 근거하여 천수관음의 형상과 거기에 따른 수없는 공능(功能)에 의지하여 현세이익적인 수행에 중심을 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오래 전부터 관음신앙에 관한 전설이 많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신라시대 선덕왕 때의 고승이던 자장법사는 태어나기 전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얻기 위해 관음상 천부(千部)를 조성하고 4월 초파일에 아들을 얻어 그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의상대사는 강원도 양양의 바닷가에서 관음진신이 머문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서 진심으로 친견을 소원하다가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바닷가 동굴에 머물던 관음보살이 의상대사를 받아 내어 목숨을 건지게 한 설화가 있습니다.
  그밖에도, 경주 남항사의 십일면관음보살상은 비구니의 몸으로 나타나서 경흥의 병을 고쳐 주었고, 백율사의 대비상(大悲像)은 사문의 몸으로 나타나 이국 땅에 잡혀간 국선(國仙) 부례랑과 안상을 구해 왔으며, 분황사의 천수대비상은 눈먼 희명의 아들에게 눈을 뜨게 했고, 민장사의 관음상은 승려로 나타나 가난한 여인의 아들 장춘을 오나라 땅으로부터 데려 왔으며, 낙산사의 관음은 속세의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여 번민에 빠진 조신(調信)을 구한 얘기 등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K 형 !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28번째 만나게 되는 선지식(善知識)으로 관세음보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만나고자 찾아간 보타락가산(補陀落伽山)은 남방 해안에 있으며 숲이 우거져 산길이 험하고, 꼭대기에 호수가 있으며 호수의 물이 흘러 남해로 들어가는데 관음보살은 정상 부근 석굴에 머물면서 가부좌하고 금강보좌 위에 앉아 중생이 모든 고뇌와 고통을 벗어날 수 있도록 제도하고 계신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범어인 ‘보타락가’산의 ‘보타’는 ‘희다(白)’는 뜻이고, ‘락가’는 ‘피어 있다(華)’는 뜻으로 이를 한역하여 백화산(白華山)이라고 하며, 의역하여 광명산(光明山)이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관음보살이 있는 곳은 남방 해안의 높은 보타락가산이므로, 불국사에서는 대웅전 뒷편에 산 쪽으로 석축이 여러 단 쌓아올려진 가장 높은 곳에 관음전이 건축되어 있습니다. 또 대웅전 마당에서 관음전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을 ‘낙가교’라고 하고 낙가교 위에 있는 문을 ‘해안문(海岸門)’이라고 하여, 그곳이 바로 화엄경에 설하여진 관음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불국사 관음전 앞에는 낙가교와 해안문만이 남아 있으나, 원래 그곳에는 해안문의 좌우에 회랑이 있고, 그 양쪽에 취죽루(翠竹樓)와 녹양각(綠楊閣)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해안문의 좌우에 검은 대나무와 푸른 버드나무를 상징하는 누각을 두었다는 것인데, 오래 전부터  대나무와 버드나무는 관음보살의 상징물의 하나로 자주 사용되는 것이며,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으로는 돈황석굴에 남아 있는 벽화에서도 관음보살 옆에 대나무와 버드나무의 표현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관음보살과 대나무, 버드나무의 관련성을 찾는 것도 무척 흥미있는 것입니다.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陀羅尼呪經-일명 청관음다라니경"에서는, 옛날 동인도 비사리성에 월개장자(月蓋長子)라는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부자가 살았는데, 그 나라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끝내는 월개장자의 사랑하는 딸도 그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월개장자는 딸을 살리기 위하여 석가모니를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며 애원합니다. 그러자 석가는 그를 가련히 여겨 서방세계의 아미타불에게 죄업을 참회하고 간청해 보도록 가르쳐 줍니다. 월개장자는 집으로 돌아와 지성으로 아미타불을 청했더니, 아미타불은 관음(觀音), 세지(世地) 두 보살을 거느리고 월개장자 앞에 내현(內現)하여 광명으로 비사리성을 비추고, 관음보살은 한 손에 정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에 버드나무를 들고서, 버드나무로 정병의 물을 사람들에게 뿌렸더니, 모든 사람들과 월개장자의 딸의 병도 나았습니다.
그러자, 비사리성 사람들이 버드나무와 정병을 관음보살에게 바쳤으며,
관음보살은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시방제불구호중신주(十方諸佛救護衆神呪)를 설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청관음행법(請觀音行法)은 양지정수법(楊枝淨水法)이라고 하고,
이러한 연유로, 청관음행법을 구하는 뜻에서 관음보살상에는 반드시 정병과 버드나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한편, 관음보살상에 대나무가 자주 표현되는 것은, 화엄경에 따르면 관음보살의 주처인 보타낙가산의 석굴 부근에는 자죽림(紫竹林)이 있다고 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대체로 중국 당나라의 주방(周昉)의 회화로부터 연유한다고 하며,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 따르면,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들어와 주방의 회화를 다량으로 구입해 간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편, 이러한 연유에 따라, "삼국유사 39권 탑상(塔像) 제4"에는,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동해 해변의 굴에 상주하신다는 말을 듣고 그 곳을 낙산(洛山)이라고 했고, 의상은 재계하고 관음보살을 만났는데, 관음보살은 의상에게,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 있는 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하겠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곳에 쌍죽(雙竹)이 솟아 있어, 의상은 그곳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모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관음보살상을 회화로서 표현한 것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은 고려불화인 수월관음상인데 이곳에서도 반드시 대나무와 버드나무가 발견됩니다.

  불국사 관음전에는 지금은 취죽루가 남아 있지 않지만 최근에 관음전의 담벽 아래에 오죽(烏竹)을 심어 놓아 그곳이 관음보살의 주처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한편, 고려 관음보살도 중에는 모란꽃 가지를 문 파랑새가 표현된 것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삼국유사 중 낙산사의 관음설화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원효대사가 낙산에 계신다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기 위해 낙산사로 가는 도중에 냇가에서 빨래하는 여인을 만나 마실 물을 청했는데, 그 여인은 빨래하던 월면수(月綿水, 월경수)를 떠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원효는 그 물을 더럽게 여겨 물을 버리고 다시 떠서 마셨더니 소나무에 앉아 있던 파랑새가 '제호(醍皓, 생명의 근원수)를 싫다는 화상, 제호를 싫다고 하는 화상'이라고 조롱 섞인 노래를 부르고, 그 사이에 여인과 파랑새는 사라지고 짚신 한 짝만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원효가 낙산사에 도착하여 관음상에 이르니, 관음상 밑에는 냇가에서 보았던 짚신이 한 짝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서야 , 그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모란꽃을 문 파랑새가 그려지며 이는 전체적으로 희망과 기쁜 소식의 전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불국사 관음전의 해안문을 들어서면 관음전이 보입니다.
관음전은 751년에 창건되었으나 그 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718년까지 몇 차례 중창되었다가 없어졌고, 그 후 1973년에 새로 복원되었습니다. 복원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거의 정방형이고, 건물 안에는 원래 신라 경명왕 5년(992년)에 경명왕비가 향목(香木)으로 만던 관세음보살상이 있었다고 하나 남아 있지 아니하고, 지금은 화려한 관음보살 입상이 있습니다.

관음보살입상 뒤에는 탱화가 그려져 있는데, 탱화에 그려진 관음보살은 보관을 쓰고, 보관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관음보살은 이처럼 아미타불이 모셔진 보관을 쓰고 있는 것이 다른 보살상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입니다.
이러한 관음보살상의 보관(寶冠) 형태는, "관무량수경"에 의하면, 관음보살은 머리 위에 머리카락을 묶은 상투와 같은 육계(肉繫)가 있으며 머리 위 보관에는 화불(化佛)이 있다고 하며, "보타락해회의궤(補陀落海會儀軌)"에 따르면, 화불은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관음보살상은 보관에 아미타불의 화불이 있으며, 손에는 보통 감로수를 담은 정병을 잡기도 하지만 연화(蓮花)를 잡기도 하고, 보주(寶珠)를 잡거나 아무 것도 잡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탱화의 관세음보살상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 그려진 천수천안(千手千眼)이며 이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널리 보고 쉽게 어루만져 주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관세음보살상의 머리에는 열한 개의 얼굴이 보태져 있는데 이는 십일면(十一面)관음상의 특징이며, 11면관음상의 의궤(儀軌)인 “십일면신주심경(十一面神呪心經)”에 따르면, “앞의 3면은 자비상(慈悲相)인데 선한 중생을 보고 자비심을 일으켜 이를 찬양함을 나타낸 것이다.
왼쪽의 3면은 진노상(瞋怒相)으로 악한 중생을 보고 진노하여 그를 고통에서 구하려 함을 나타낸 것이요, 오른쪽의 3면은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 흰 이를 드러내어 미소짓는 모습)이며, 이는 정업(淨業)을 행하고 있는 자를 보고는 더욱 불도(佛道)를 정진하도록 권장함을 나타낸 것이다. 뒤의 1면은 폭대소상(暴大笑相)으로서 착한 자, 악한 자 모든 부류의 중생들이 함께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모두 포섭하는 대도량(大度量)을 보이는 것이며, 정상(頂上)의 1면은 불면상(佛面相)은 대승근기(大乘根機)를 가진 자들에 대해 불도(佛道)의 구경(究竟)을 설(說)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K 형 !
불국사 관음전은 이처럼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하여 그곳이 관음보살의 주처(住處)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상징물들은 결국 참배자들이 그 상징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자비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에 주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불국사 관음전 아래에서 오랫동안 해안문을 올려다보며 자비심을 명상하다가 관음전에 올라가 참배하고 돌아오면, 정작 제가 그곳에서 살펴보고 참배한 것은 관음보살상을 모신 전각이 아니라 제 마음속에 자리하는 자비(慈悲)라는 이름의 단면(斷面)을 만지고 또 느끼며 그 마음에 참배하고 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K 형 !
다시 계절은 무심하게 변화하여 가고, 단풍으로 화려했던 계곡에도 황량한 겨울이 오겠지요.
겨울이 오면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다시 불국사 관음전에 가 보아야겠습니다. 겨울바람에 언 손을 녹이며 다시 한번 “자비”를 만지며 또 느껴 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거듭된 세월 끝에는 신라인들이 진정으로 꿈꾸었던 “부처님의 나라”를 온전히 만지며 또 느낄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말입니다.

K 형 !
이렇게 형에게 불국사 관음전을 바라보는 저의 기원을 말씀드리고 있노라니 어느새 형이  가까이 다가와 턱을 괴고는 제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이 있는 그곳과 제가 있는 이곳이 둘이 아닌 한 세상일 줄을 알 것만 같습니다.

돌아가시는 길에 서쪽으로 맑은 땅이 보이거든 제게도 한소식 전해 주시기를 빌면서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