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대왕 신종을 보며 (신종에 새겨진 문장-명문- 해설)


 1.                                              
국립경주박물관 앞마당에는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 神宗, 국보 제29호)이 있습니다.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립니다.

성덕대왕 신종의 가치와 그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는 종의 기원을 알고, 다른 종(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종들)과 그 형태를 비교해 보는 데서 출발하여야 하고, 아름다운 종소리의 비밀과 이치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성덕대왕 신종이야말로 우리가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왔습니다(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성덕대왕 신종을 가까이 대하면 아름다운 비천상(飛天像, 供養像이라고도 합니다)이 눈에 금방 들어옵니다.

무릎을 굻어 두 손으로 향로를 들고 있으며, 상체를 들어 앞으로 약간 숙인 형태이고, 얼굴은 조금 들어 위쪽으로 향해 있습니다. 머리카락은 감아올렸고, 꽃잎으로 장식된 반석(蓮花座)을 깔고 있습니다.
어깨와 허리에 둘려진 옷자락(天衣)은 솜털처럼 가벼운 듯 휘날리는 데 그 형태가 마치 화염처럼 보이고, 등 뒤와 발아래를 받치고 있는 식물덩굴(寶相華)은 머리 위에서 구름형태로 변해 있습니다.
옷자락과 식물덩굴은 머리 위쪽에서부터 모두 약간 왼쪽을 향해 위로 빨리는 듯 휘날리고 있습니다.

화엄사상에 근거하여 지옥에서 벗어난 환희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절절한 마음으로 경건하게 존경을 표하며 향을 올리는(供養) 모습을 알아챌 수 있고, 두 손으로 받던 향로에서 나온 향기가 흡족하게 받아들여지는 모습(受供養)이 쉽게 상상됩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간명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비천상을 보고 있노라면, 종을 만든 이의 마음이 그러하였듯이 종을 대하는 이의 마음도 경건해지고, 간곡한 마음이 됩니다.     




2.
이번 기회에 저는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져 있는 아름다운 문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성덕대왕 신종에는 두 부분에 돋을새김으로 쓰인 문장(銘文, 새겨진 글)이 있는데, 한 부분은 서(序)이고 그 반대편에 50구의 사(詞)가 있으며,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관명과 이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총 1,037자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한자로 된 이 명문(銘文)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명문에 사용된 용어와 문장의 진정한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애쓰면서 대승기신론을 읽게 되었고, 요즈음은 대승기신론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 위해 거듭 읽고 묵상하는 것이 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져 있는 서(序) 부분 문장을 풀어쓰면 아래와 같습니다. 중요 문장에는 원문도 덧붙여 둡니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밖을 둘러싸고 있어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고,
아주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고 있어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가설(假說)을 세워,
세 가지 진실(三眞)의 오묘함을 보듯이,
신종(神鐘)을 매달아 놓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고자 한다.
(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廳之不能聞其響
是故憑開假說 觀三眞之奧載 懸擧神鐘 悟一乘之圓音)

무릇 종이란 인도에서 보면 카니시카 왕이 이를 만들었고,
중국에서는 고연이 처음으로 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어 있으면서 능히 우니 그 울림은 끊임이 없으며,
무거워서 돌지 아니하니 그 모양이 이지러지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임금님의 높은 공덕을 종 위에 낱낱이 새기니,
중생들로 하여금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空而能鳴 其馨不竭 重爲難轉 其體不蹇 所而王者元功 克銘其上
群生離苦亦在其中也)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성덕대왕의 덕은 산하와 같이 드높고,
이름은 일월(日月)과 가지런할 만큼 높으며,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뽑아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악(禮樂)을 숭상하여 풍속을 살피며,
들에서는 근본이 되는 농업에 힘쓰게 하며,
시장에서는 쓸데없는 물건이 없게 하셨으니,
이때에는 금옥(金玉)을 멀리 하시고 글과 재주를 숭상하셨다.

자식을 잃은 것에 상심하지 아니하시고,
나이든 이들의 가르침에 마음을 두어,
40여 년 재위하시는 동안 정사에 힘쓰시어, 단 한 번의 전쟁도 없이 하여 백성을 놀라게 하지 않으셨도다.
이런 까닭으로, 사방의 이웃나라에서 먼 길에도 귀빈으로 찾아와 오직 풍속을 흠모하여 바라보기만 할 뿐 일찍이 전쟁을 일으킬 기회를 엿본 적이 없었으니, 연나라 진나라에서 사람을 잘 씀이나 제나라 진나라가 교대로 천하를 제패한 일을 가지고 어찌 이와 수레고삐를 나란히 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라쌍수에 누우신 시기는 헤아리기 어렵고, 세월은 흘러 대왕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34년이 되었도다.
근래에 대를 이은 아들 경덕대왕이 살아 계실 때에 왕업을 이어 국정의 모든 일을 살피셨으나, 일찍이 자애로운 어버이를 잃으시어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아버지의 엄한 훈계마저 어그러지게 되고,
텅 빈 대궐에 들면 슬픔이 더하고, 조상을 생각하는 정이 더욱 슬퍼, 명복을 비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짐에, 삼가 구리 12만 근을 내어 큰 종 1구를 만들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도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의 성군께서 행실이 조상의 뜻에 합치하고,
그 뜻이 도리에 맞아 남다른 상스러움이 천고에 특이하고 착한 덕행이도다.

번화한 거리는 활기에 차고 옥난간은 깨끗하여 칭송하는 소리는 대궐에 가득하며, 밖으로는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짐과 같고, 서울에 오색구름이 찬란히 빛남과 같으니, 이는 곧 낳아주신 은혜에 보답하심이로다. 정사에 임하실 때는 태후의 은덕을 우러러 생각하여 땅에 고루 펴서 백성을 인자하게 가르치시고, 마음은 달처럼 맑아 부자간의 지극한 효성을 장려하시도다.
이로써 아침에는 외숙의 어짐을 아시고, 저녁에는 충신들의 보필함을 아시어 옳은 말을 모두 택하시니 어떤 행동인들 허물이 있으리오.
이에 유언을 돌아보고, 마침내 숙원을 이루셨도다.

이에 일을 맡은 관리가 일을 준비하고, 기술자가 그 모형을 떠서 신해년 12월에 이르니, 때는 해와 달이 어울러 빛나고, 음양의 기운은 조화로우며 바람은 부드럽고 하늘은 고요할 때 신비로운 종이 완성되었도다.

그 모양은 큰 산이 선 듯하고, 소리는 용이 우는 듯하여,
위로는 하늘 끝까지 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아래로는 지옥에까지 그 소리가 스며들어 가니, 종을 본 사람은 기이하다고 하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복을 받을지어다.
원컨대, 이런 오묘함이 조상의 영혼을 받들어 공경하고,
진리의 맑은 소리를 듣게 하며,
스스로 불법(佛法)을 깨닫게 하여, 과거 미래 현재의 일에 밝은 마음을 묶어 부처님의 참뜻에 머물게 함이로다.
(狀如岳立 聲若龍吟 上徹於有頂之嶺 潛通於無底之方 見之者稱奇 聞之者受福 願玆妙回奉翊尊靈 聽普聞之淸響 登無說之法筵 契三明之勝心 居一乘之眞境)

이에 왕손이 번창하고 영원하며, 나라의 모든 일이 철통같이 번영하며,
욕정은 있으나 깨달음은 없는 모든 중생들이 지혜의 바다에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함이로다.

신(臣) 필오는 문장이 졸렬하고 재주가 없으나,
감히 성군의 명을 받아 반초의 붓을 빌리고 육좌의 말을 본떠,
임금께서 바라는 요지의 명문(銘文)을 종에 기록한다.
한림대 서생 대나마 김부완 씀.

3. 
성덕대왕은 신라의 33대 왕으로,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생입니다. 본명은 융기(隆基)이나 당나라 현종(玄宗)의 이름과 같아서 흥광(興光)으로 고쳤습니다. 효소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추대되어 왕으로 즉위하였고, 서기 704년에 소판(蘇判) 김원태의 딸 성정왕후(成貞王后)를 비(妃)로 맞았으나 내보내고 720년에 이찬(伊滄) 순원(順元)의 딸을 맞아 소덕왕후(炤德王后)로 삼습니다.

성덕왕 때에는 통일신라의 번성기로서 정치적 안정과 함께 사회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당이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고 735년 당으로부터 대동강(浿江) 이남 지방의 영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하였습니다.

 737년에 성덕대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 효성왕으로 즉위하나 6년 만에 서거하여, 성덕대왕의 둘째 아들인 경덕왕이 742년에 왕으로 즉위하여 부왕(父王)인 성덕대왕을 기리기 위하여(追善) 구리 12만근(정밀 측정한 종 무게는 18.9 ton)을 들여 종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경덕왕은 그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혜공왕(惠恭王)이 771년에 종을 완성하였습니다. 실로 오랜 세월동안 신종(神鐘)을 만들기 위하여 정성을 다한 끝에 명품을 완성한 것입니다.

통일신라의 전성기에는 6두품 출신의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활용하는 정치형태가 완성되어, 성덕대왕신종에도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아홉째 급찬(級滄)에 속하는 한림원의 김필오가 신종에 새길 명문을 지었습니다.

4.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밖을 둘러싸고 있어서 눈으로 보아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고, 큰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여 귀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설을 세워 세 가지 진실의 오묘한 경지를 보듯이 신종을 매달아 놓고 일승의 원음을 깨닫고자 한다."

성덕대왕신종 명문의 첫머리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실로 명문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기도 하며,
명문의 첫머리로 쓰이기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던 강우방 선생님의 표현처럼, 이 첫머리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악의 웅장한 도입부분을 연상케 합니다.

저는 이 첫머리 부분에 매료되어 한동안 적어 다니면서 그 뜻을 새겨보곤 했는데, 그 깊은 뜻을 알기 위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마지막으로 제가 의탁한 분은 바로 원효대사였습니다.

원효대사는 "대승기신론소"에서 부처님의 말씀이 있는데 따로 대승기신론을 지은 까닭에 대하여 말하면서, 처음에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법을 듣는 사람이 수승(秀勝, 뛰어나게 빼어남)하여 그 말씀하시는 뜻을 누구나 바로 알아들었으나, 부처님 열반 후에는 여러 중생이 저마다의 능력(根氣)이 천차만별이어서 다른 종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대승기신론을 짓게 된 것이라고 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은 두루 모든 이에게 바른 뜻을 전하는 원음(圓音)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원음”에 대하여 이렇게 씁니다.

 원음(圓音)이란 곧 일음(一音)이니, 일음과 원음은 그 뜻이 어떠한가 ?

예부터 여러 논사(論師)의 설한 것이 같지 아니하니, 어떤 논사는 설하기를, “여러 부처는 오직 제일의신(第一義身)이니, 영원히 만상(萬像)을 끊어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으나, 다만 중생의 근기를 따라 한량없는 형체와 소리를 현현(顯現)하신다.”
이는 마치 빈 골짜기에 소리가 없으나 부름을 따라 메아리가 나오는 것과 같다. 그러니 부처님 편에서 말한다면 소리가 없는 것이니 하나이지만, 중생의 근기를 가지고 논한다면 여러 가지의 소리이니 곧 하나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무슨 뜻으로 일음(一音)이니 원음(圓音)이니 말하는 것인가 ?

참으로 같은 때 같은 모임에서 다른 종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그 근성에 따라서 각각 일음을 얻고 다른 소리는 듣지 아니하여 착란되지 아니하니, 이처럼 음의 기특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음(一音)이라 이른 것이다.

음이 시방(十方)에 두루하여 근기가 성숙한 정도에 따라 듣지 못하는 바가 없으니 원음(圓音)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허공처럼 두루 가득차 별다른 운곡(韻曲)이 없는 것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경에서 이르기를 “그 무리들의 음에 따라 중생에게 널리 일러준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또 어떤 이가 설하기를 “부처님 편에서 말한다면 실로 형체와 소리가 있으며 그 소리가 원만하여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 도무지 궁음(宮音)과 상음(商音)의 다름도 없거늘 어찌 평성(平聲)과 상성(上聲)의 다름이 있겠는가?
이처럼 다른 곡조가 없기 때문에 일음(一音)이라 이름하며,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에 원음(圓音)이라고 설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5.
원효대사의 이 부분 글을 읽으면서,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문장을 쓴 김필오도 아마 당시 유행하던 화엄사상과 원효대사의 책에 담겨져 있는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에 잠기어 명문의 첫머리를 다시 읽어보면, 당시 사람들이 신종을 만들게 된 이유는 바로 부처님의 원만구족한 음성을 종소리로써 듣고자 하였던 염원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큰 진리는 눈에 보이는 형상의 밖에 있는 것이어서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가 없고, 부처님이 설하신 지극히 큰 진리의 말씀은 귀로 들어서는 그 본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막대기를 세워 그림자를 보고서야 비로소 천지에 가득찬 빛의 움직임을 알고, 깃발을 달아 그 펄럭임을 보고서야 허공에 도는 바람을 알아챌 수 있듯이, 신종을 만들어 그 울림으로 부처님의 큰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명문의 첫머리 부분을 명상하여 보면,
당시 신라인들의 사고와 염원에 한 발짝 가깝게 접근하게 되고, 당시 사람들이 꿈꾸고 도달하고자 하였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6. 
저는 명문의 첫머리를 적어 다니며,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를 몇 번이나 읽어보고 다시 성덕대왕신종 앞에 서 보고서야, 신종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요사이 경주박물관 참관은, 먼저 박물관 앞마당에서 신종을 바라보며 당시 신라인들이 신종을 보면서 염원하였을 부처님 땅(佛國土)을 더불어 생각하여 보고, 뒷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곳에 있는 고선사지 삼층석탑을 찾아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고선사는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던 곳이어서, 원효대사께서도 고선사에서 이 삼층석탑을 바라보며 석탑을 휘돌고 가는 바람과 계절의 변화를 느꼈으리라 생각하다보면, 천년의 시간을 넘어, 문득, 석탑 뒤에서 원효대사께서 조용히 명상하며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는 듯한 행복한 느낌을 가지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