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國寺 大雄殿에서
- 아름다움의 源流를 찾아서 -
오랜만에 다시 불러봅니다. K형과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눈 지도 벌써 다섯 해가 지났다고 생각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스레 느끼게 됩니다.
K형 ! 조금 한가롭게 들릴 지 모르지만, 요즈음 저는 절실한 마음으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점에 관심을 집중하여 왔습니다.
가을 산행 길에 만나는 들국화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그 원천이 있는 것일까요.
들국화의 꽃잎 하나, 꽃술 하나, 그 빛깔, 가늘게 올라온 꽃대의 신비로움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름답다는 것은 깊이 의문을 가질 여지도 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거기다가 들국화의 그윽한 향기마저 맡게 되는 날에는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하고 분명하여, 도무지 “아름답다”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懷疑)마저 듭니다.
K형 !
그러나, 제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관심을 집중하는 이유가 그 질문 자체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구하고자 함에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그 날,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의 원류(源流)를 알아내는 그 날, 제가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 대한 지극한 불안(不安)과 터질 듯한 허무(虛無)를 벗어 던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 날, 저는 비로소 평화로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으며, 비로소 진정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각에 이르게 되면서, 저는 삶의 본질적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 마음을 제 스스로 단박에 알아보기 위하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명한 그림자 중의 하나인 ‘아름다움’을 잡고서 그것을 깊이 관찰하고, 늘 손에서 떼지 않고 만지며, 그것의 변화와 모순과 부딪침을 살펴보는 것이 좋은 도구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이지러지는 가운데, ‘아름다움’이 피어나고 사그라지는 원천인 ‘마음’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K형 !
그런 생각 가운데 제가 찾아가는 곳은 경주의 불국사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도시 곳곳에 천 년 전 조상들의 숨결이 남겨져 있고, 조상들의 기품과 이상 그리고 그들의 한결같은 염원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건축물로 형상화되어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일주문을 지나 느릿느릿 올라가 보면 웅장한 모습의 불국사. 천천히 회랑을 지나 대웅전 앞에 서면 감탄이 절로 나는 석가탑과 다보탑, 내려다보이는 청운교, 백운교. 불국사를 거닐면서 이 곳이 바로 신라사람들이 꿈꿔 오던 부처님 나라, 불국토를 형상화한 것임을 안다면, 또 천년의 세월을 버텨온 석조물에서 당시 석공들의 호흡을 느껴 보려는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이 절은 훨씬 많은 것을 순례자들의 마음에 남겨주기 때문입니다.
K형 !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신라인이 지상에 만들어 놓은 이상적인 피안(彼岸)의 세계입니다. 그런 탓에, 이곳의 모든 조형물 하나하나에는 부처님 나라를 표현하는 상징과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부처님의 나라를 표현하기 위하여 높은 석축을 쌓아 범부(凡夫)의 세계와 불국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축 위의 경내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영역은 석가모니불이 관장하는 사바세계, 극락전이 있는 곳은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 극락세계, 비로전이 있는 영역은 비로자나불, 즉 일체의 법이 화(化)하여 나타나시는 법신불(法身佛)을 모신 연화장 세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대웅전은 불국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존 건물은 1765년에 중창된 것이나 신라시대의 원형이 보존된 것은 아니지만 초석(礎石)과 석단(石檀)은 대체로 원래 그대로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5칸인 대웅전의 동서 길이는 61.35척이고, 남북의 폭은 55.65척이며, 높이는 4척 4촌입니다. 4면에 돌계단이 있으며, 좌우는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웅전의 내부 전면에는 수미단(須彌檀)이 있고, 그 위에 석가삼존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앙에 있으며, 그 좌우에 미래에 오실 부처님인 미륵보살과 과거에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성불할 것을 수기(授記)한 갈라보살(Dipamkara, 定光如來)이 협시(脇侍)하고 있으며,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마하가섭과 아난의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불국사고금창기(古今創記)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다섯 상은 김대성에 의하여 불국사가 창건되기 이전인 651년에 이미 모셔졌다고 하며, 지금의 것은 아마도 임진왜란 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대상물은 예전과 동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대웅전 안에 이처럼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갈라보살이 모셔진 것은 특이한 것으로, 이는 과거, 현재, 미래의 3세 부처님을 모두 모셔둔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이 약간 길지만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불단이 뒤쪽으로 치우쳐 있어 내부 공간이 넓게 느껴집니다. 내부에는 안두리 기둥(內陳柱)을 둘렀는데 앞뒤 쪽으로는 외두리 기둥(外陳柱) 배열과 같게 배치하고 측면 쪽은 기둥 1개를 생략한 이른바 감주법(減柱法)을 적용하여 공간을 넓게 한 것입니다.
공포는 다포로 외3출(外三出), 내4출(內四出)의 형식으로 외7포(外七包), 내9포작(內九包作)이며, 살미 첨차(山彌 詹遮)는 초화무늬(草花紋)와 봉황 머리 등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특히 평방(平枋)에서 돌출된 용머리가 돋보이며, 가구(架構)는 2고주(二高柱) 7량가(七樑架)로 고주 위에 대량(大樑)을 얹고 대량 위에는 동자주를 얹고 종량(宗樑)을 놓아 판대공(板臺工)이 종도리(宗道里)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K형 !
저는 불국사 대웅전을 여러 차례 찾아가고, 대웅전의 기둥에 기대어 오랫동안 석가모니 부처님을 경배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애절한 마음으로 오로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하다가, 언제부터인지 불국사 대웅전의 배치에 관하여 의문을 가지고, 과연 천년전 신라의 건축공들은 어떻게 불국사 대웅전의 크기와 탑의 배치를 결정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 의문에 답한 것은 놀랍게도 일제시대에 조선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30세의 나이로 요절한 일본인 측량기사가 남긴 글이었습니다.
일본인 요네다 미요지는 불국사의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한 가람 일곽(一廓)의 평면계획에 어떤 기준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불국사 일곽을 조형함에 있어 지할(地割)이라고 일컫는 기준단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실제 측량을 통하여 입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노력의 성과는 유고집인 "조선상대 건축의 연구" 가운데 "불국사 조영계획에 대하여"라고 소제목을 단 부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는 불국사 가람의 실측치를 비교해보니 당시에 사용된 당척(唐尺) 1척은 0.980125곡척(曲尺, 현재의 1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당척을 기준으로 하여 불국사 일곽을 실측해본 결과, 석가탑, 다보탑의 중심 사이 거리는 86당척이며, 이를 2등분한 43당척이 불국사의 평면 기준길이가 된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즉, 이 길이로써 동서 탑심(東西 塔心)으로부터 동서의 회랑 위치를 측정하면 회랑 바깥쪽 기둥중심(柱心)에 일치하고, 남쪽 회랑 바깥쪽 기둥 중심을 기점으로 하여 43당척씩 접어가다가 그 일치점을 북쪽에서 찾으면 약 3촌(寸)의 차이를 두고 무설전의 앞쪽 두 번째 기둥선과 만나고, 이는 또한 북회랑의 내측 기둥중심 위치와도 일치합니다.
이를 대웅전 영역에서 보면, 회랑의 가로면 길이는 43당척의 4배가 되고, 회랑의 세로면 길이는 43당척의 5배가 되어 전체적으로 4:5의 직사각형을 이룹니다. 그리고, 자하문의 도리간은 17.2당척으로 이는 기준길이인 43당척의 3분의 2에 일치하고, 무설전의 보간 1칸의 기둥거리 12.15당척은 43당척을 한 변으로 한 정방형의 대각선 길이의 5분의 1에 해당합니다.
대웅전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을 상정할 때 그 윗변의 중심점을 꼭지점으로 하여, 그 직사각형의 아래쪽 꼭지점을 잇는 선을 그으면, 그 선은 남쪽 회랑의 각 꼭지점에 일치합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대웅전의 앞쪽 계단 첫째부분의 중앙을 중심으로 하여 동탑의 중심을 반지름으로 하는 원으로 그으면, 그 원은 서탑의 중심을 지나고, 바로 대웅전을 이루는 직사각형의 윗변의 중심점을 지난다. 이러한 지할(地割)은 동서 양탑의 기준길이가 됩니다. 즉, 석가탑과 다보탑의 하층 기단대석의 폭은 43당척의 3분의 1인 14.6당척에 가깝습니다.
요네다 미요지는, 이러한 지할 관계가 43당척을 기준길이를 하여 삼각형과 원형을 이루면서 양 탑과 회랑, 무설전의 위치와 크기를 결정하였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특히 주목한 것은, 석가탑의 크기가 대웅전의 크기에 정확하게 비례관계를 이루도록 건축되었다고 보여지는 점이었습니다. 요네다 미요지는 대웅전의 보간(동서간) 총길이인 52.8당척의 10분의 1인 5.28당척이 바로 석가탑 제1층 탑신의 하부 폭에 일치하고, 대웅전의 도리간(남북간) 총길이 46.8당척의 10분의 1인 4.68당척이 석가탑의 1층 탑신부 높이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요네다 미요지가 발견한 기준길이는 가람 중심부의 규모를 결정하는 단위가 되고, 가람내 각 조영물의 배치나 크기 혹은 각종 제작기법의 기준수치로써 응용되고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은 옳다고 보여집니다. 실로 그가 그려놓은 불국사의 조형물 배치에 대한 실측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치밀성과 탁월한 추리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네다 미요지가 발견한 바와 같이 석가탑의 1층 탑신의 하부 폭과 높이가 바로 대웅전의 보간, 도리간 길이의 10분의 1로써 결정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름답다", "조화롭다"고 느끼게 되는 것의 본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고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여러 가지 요소의 조화가 관찰자에게 주는 만족감, 동일감, 성취감의 한 표현일 것이고, 그와 같은 아름다움을 주기 위한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비례관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비례관계"란 바로 우리네 인간이 태고로부터 관찰하여 왔던 자연물에서 익힌 "비례관계"와 일치할 때에 오는 심적인 작용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요네다 미요지의 발견은 실로 많은 사색의 기초를 제공했습니다. 그의 측량과 기준단위의 발견을 바탕으로 하여 불국사의 조형계획의 일단을 알 수 있고, 나아가 당시의 제작자들이 불국사의 조형을 통하여 참례자에게 느끼게 하고 싶었던 미적 효과를 추리해낼 수 있으며, 그 추리에 상상력의 초점을 맞추어갈 때에야말로 진정 감동적으로 불국사의 아름다움에 젖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네다 미요지가 그의 치밀한 노력과 열정에 의하여 시간을 뛰어넘어 통일신라 시대 제작자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가 한량없이 부러워지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제가 불국사를 찾아가면서, 그곳에서 찾고자 하고 그리워하는 바로 이유는, 천년의 시간을 넘어 통일신라인들이 그리던 부처님의 나라를 그들과 더불어 느끼며 환희에 젖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어떤 것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본체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우리의 질문에 대하여 인류는 고대로부터 많은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해답과 그에 대한 반성적인 고찰을 통하여 진정한 대답을 듣고자 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에서 이데아(Idea, 理念)는 우주에서 최고의 존재이고, 모든 것의 원형이며, 따라서 이데아야말로 최고의 미이며, 그 중에서도 선(善)의 이데아야말로 최고의 이데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주의 본질인 이데아를 가장 잘 모사한 것, 가장 잘 모방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비모사적(非模寫的)인 미(美)에 대하여 수학적, 기하학적 형태의 조화야말로 아름다움이라고 하였다. 즉, 악기가 내는 소리의 진동수의 비율과 그 비율이 음높이의 차이에 의하여 순서대로 나타날 때 음계와 선율의 아름다움이 발현되는 것이며, 이와 같은 수(數)의 질서가 천체의 운행이나 인생의 질서를 유지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후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의 이러한 견해에 대한 반박과 발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향연"의 저자인 크세노폰은 선(善)한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선한 것, 유용한 것이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라는 그의 견해는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하여 "쇠똥 망태기도 그것이 독자적인 역할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다면 아름다운 것이다. 황금의 방패도 역할에 맞지 않으면 추한 것이다"고 하여 그의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아름다움에 관한 그리스의 책들을 읽어나가다가 어느 날 헬레니즘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서"(원 제목은 '건축에 관한 10서')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건축의 아름다움에 대한 놀랄만한 관찰결과와 견해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 B.C. 25년경)의 "건축서"는 당시의 신전, 성곽, 해시계, 기계의 제작에 관한 편람적인 서술을 담고 있으며, 건축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견해를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비트루비우스에 의하면, 먼저 건축의 미는 실용성이나 강도(强度)와는 구별되어 이와 동등한 한 요소로 다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건축은 강하고, 실용적이며, 아름다움의 원리가 계속 유지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이 세 요소를 병렬적 관계로 제시하면서, 건축의 아름다움은 "건물의 외관이 경쾌하고 우아하며, 건물 각 부의 치수관계가 올바른 균제비례를 이루고 있는 경우에 얻어지는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균제비례"(Symmetry)에 대하여, "신전의 구성은 균제비례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것은 그리스인이 아나로기아라고 부르는 비례에서 얻어진다. 비례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건물의 각 부분과 전체에 일정한 비수를 할당하는 것이며, 이에 의해 균제비례의 법칙이 실현된다"고 하고, 그 균제비례의 실현은 인체의 비례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즉, 인체의 치수는 간단한 비례를 형성하는데, 안면은 턱에서 이마 위 머리카락이 있는 부분까지로 신장의 10분의 1이고, 손바닥은 손목에서 장지 끝까지로 팔 길이의 10분의 1이며, 머리는 턱에서 머리끝까지로 신장의 8분의 1이라는 것이다. 또, 인체는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에 들어맞으며, 사람이 손과 발을 펴고 드러누웠을 때 컴퍼스의 선단을 배꼽에 놓고서 원을 그리면 손과 발끝이 이 원주선에 닿는다. 또 양발을 붙이고 양손을 펼치면 정방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연이 바로 인체를 이처럼 전체적으로 비례에 맞추어 만들었으므로 신전도 이러한 비례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고, 이러한 비례에 따라 신전 기둥의 배치, 기둥의 높이와 둘레, 그 위에 있는 수평재의 조합을 제시하고 있다. 비트루비우스는 그의 "건축서"에서 마지막으로 미량변형(微量變形)과 착시교정(錯視矯正)에 대하여 부기하는바, 미량변형이란, 건축물을 구성하는 직선을 약간 만곡시키거나 혹은 수직선을 약간 기울어지게 하는 것이다. 또 착시교정이란 형태가 비뚤어져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미량변형을 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신전을 건축함에 있어, 기단의 중앙부를 높여야 하는데 그 까닭은 수평으로 만들면 눈에는 오목하게 보이기 때문이며, 기둥은 성긴 곳에는 두껍게, 밀집한 곳에는 가늘게 하고, 모퉁이 기둥은 주위의 탁트인 공간에 의해 더욱 가늘게 보이므로 직경의 50분의 1을 더 굵게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또, 시선이 높아질수록 공기가 엷어져 대상이 명확하게 파악되기 어렵게 되므로 높은 곳에 쓸 구조물은 비례에 얼마간을 더 가산하여야 한다고 제시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세세하게 미량변형과 착시교정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바, 그의 그와 같은 실험심리학적 건축미론은 실로 정교한 것이라는 데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고대로부터의 미학논쟁에 대하여는 나중에 따로 보기로 하고, 우선 비트루비우스가 제시한 "균제비례"는 실로 석굴암과 불국사의 조형원칙에 비추어 그지없이 정확하게 그 아름다움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놀라운 것은, 비트루비우스가 말하는 ‘미량변형’과 ‘착시교정’이 석굴암 본존불의 후광 장식 등에도 정확하게 적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석굴암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에서 이미 말하였거니와 요네다 미요지는 불국사의 조형물 중 대웅전의 보간, 도리간 길이의 10분의 1로써 석가탑의 1층 기단부의 폭과 높이가 결정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러한 10분의 1이란 바로 비트루비우스가 인체의 비례관계에서 발견한 안면과 신장의 관계, 손바닥과 팔 길이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비례입니다.
또한, 불국사 대웅전을 이루는 직사각형의 윗변 중앙점을 꼭지점으로 하여 대웅전의 아랫변 꼭지점을 잇는 삼각형을 그으면 그 아래쪽 꼭지점은 남회랑의 양 꼭지점에 정확하게 일치하고, 대웅전 돌계단의 중앙을 원의 중심으로 하고, 그곳에서 다보탑의 중심을 잇는 길이를 반지름으로 한 원을 그으면, 그 위쪽은 대웅전을 이루는 직사각형의 윗변 중앙에 일치하고, 석가탑의 중심에 일치합니다. 이는 비트루비우스가 말한 바와 같이 손발을 뻗친 인체가 원이나 정방형에 내접하는 관계를 그대로 실현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건대, 인류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이란 없는 것이고, 오로지 주어진 물질세계가 있으며, 그 물질세계의 비례관계에 익숙해진 눈과 마음이 동일한 비례관계가 내재된 것에서 안정감과 동일감을 느끼며, 거기에서 아름다움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솟아 나오지 않겠는가 추론해보면, 이러한 추론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건축을 하는 이에게 있어, 특히 신전을 건축하는 이에게 있어 가장 지고의 임무인, 순례자에게 저절로 아름다움의 감정과 신비함, 엄정함, 자연스러움, 숭고함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공통된 경험에 의하여 발견된 비례관계와 기하학적 구조를 건축물의 조형에 응용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관찰을 통하여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생각하고, 천년의 시간을 넘어 당시의 신라인들과 함께 하는 감동을 꿈꾸며, 그와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명상'과 '함께 하는 감동'을 통하여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서'를 읽고서, 그가 제시하는 균제비례가 바로 석굴암과 불국사의 조형에 철저히 투영되어 있음을 발견함으로써 한 발짝 더 진정한 아름다움에, 진정한 감동에 다가서게 된 것 같아 짜릿한 전율감에 벅찬 마음으로 다시 경주에 갔고,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사무치게 고마운 뜨거운 감정을 느꼈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습니다.
“아름답지 않은가, 석굴암과 불국사.
그 곳에 의미와 신앙을 남긴 선인들로 인하여,
천년의 시간은 잠시 그 건축물에 찰라와도 같이 한 점으로 수축되고,
그곳에서 인생의 허무함도 다시 아름다워지는 것이니.
찾고 또 찾으며,
만나고 또 만남으로써
온갖 번뇌와 의심과 두려움도 불태워지는 독버섯처럼 사그라지고,
그 자리에 빛나는 여여(如如)함 우뚝 서지 않겠는가“
절로 나오는 찬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K형 !
아름다움의 원류를 찾아가는 저의 심정을 형에게 전하면서 한마디만 더 보태고 싶습니다. 사실, 아름다움이란 비례관계에 맞아야만 된다든지, 인체의 아름다움에 원류를 둔 것만은 아닙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저의 사고방식에 대전환을 이루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대웅전의 마루바닥 입니다. 대웅전의 마루바닥을 자세히 보면, 중간의 기둥사이에 놓여져 있는 바닥 칸막이 나무가 특이하게 휘어진 채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바닥 나무들은 모두 일정한 크기로 다듬어져 가지런하게 놓여져 있지만, 좌, 우의 바닥 칸막이 나무는 나무가 휘어진 그대로를 잘라 깔고, 휘어진 바닥나무에 크기가 작은 바닥나무로 칸을 맞추었습니다.
대웅전에서, 이 바닥 칸막이 나무의 휘어진 모습을 보노라면, 작은 파격을 이룬 당시의 목수가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이처럼 작은 파격으로 대웅전 바닥을 배열한 당시 목수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루를 이루어, 대웅전 부처님께 머리 조아리는 참례자들의 발을 받치고자 서원(誓願)할 나무들의 마음을 그대로 알아차려, 목수는 곧거나 휘어지거나 나무들 있는 그대로 대웅전 마루를 이루도록 배려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요.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목수가 나무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나무들 모두를 너그러이 배려함이 참으로 의미 있고 또 멋있는 일 입니다.
나무들 휘어진 그대로 부처님께 조배드리고, 사람들 있는 그대로 대웅전 부처님께 조배드릴 수 있도록 작은 하나하나에도 의미와 상징을 가지고 부처님 나라를 표현하고자 했던 당시의 목수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에 아름다움이 고입니다. 고마움과 신앙심이 가득 고여, 그 향기 아름다움에, 대웅전은 벌써 아름다운 불국토가 되어 미혹한 인간을 불성으로 이끌게 되는 것이리라 생각해보며, 뜨거운 마음으로 대웅전을 나오게 되는 것도, 불국사만이 주는 훌륭한 선물입니다.
이처럼, 참 아름다움은 고상한 너그러움, 여운, 그리고 자유로움에서 그 대미를 장식합니다.
K형 ! 이제 또 헤어져야 할 시간이군요.
형이 있는 그 곳과 제가 있는 이 곳이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님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늘 형을 불러보고 또 마음으로부터 기대어 있으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형은 제 마음을 기댄 그곳에 든든히 서있음을 알 수 있으니까요.
요즈음은 산행길에 흘낏 들국화 향기라도 맡게 되면, 또 형님이 콧노래를 부르며 그곳에서 이곳으로 건너오고 있는 것이려니 생각하곤 합니다.
늘 그 곳 생활에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또 그 곳에 다다르기 전까지 이 곳에서 허무를 이기고, 아름다움을 찾으며 제 한 마음 바로 보기 위하여 매진하여 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