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천룡사지를 다녀와서 (3)

 천룡사지를 다녀와서..(3)



(天龍寺의 꿈3)

추련선사는 天女와 龍女의 두손을 가만히 모아 쥐고서 황룡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두딸은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자신들도 모르게 두손이 따뜻해지면서 손을 타고 뜨뜻한 열기가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흠칫 놀랐으나,
이내 추련선사에 대한 믿음으로 두손을 다소곳이 내어 맡긴 채 선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황룡은 이제 너희 아버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할 준비를 다 갖추었다. 본디 지하세계에 속하는 황룡이 지상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황룡은 자신이 어떠한 죄과를 받게 된다고 할 지라도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감추기 위하여서라도 너희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더군다나, 황룡은 청사가 너희 어머니 치마 속으로 스며들어간 후 너희 두딸을 낳은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다."

天女와 龍女는 선사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황룡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에 어떻게 해서든지 황룡의 속셈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하였다.

"오늘밤, 황룡이 그믐을 이용하여 땅을 삐져나와 이 암자 아래에 있는 우물로 물을 마시러 나갈 것이다. 황룡이 그믐달의 정기가 내어스린 우물을 마시는 날에는 계획했던 마수를 너희 아버지에게까지 뻗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너희들은 내 말을 잘 명심하여 오늘밤 황룡이 우물을 마시는 것을 막아야 한다"

天女와 龍女는 선사로부터 오랫동안 궁리를 다하여 마련한 듯한 계책을 차근히 들었다.
선사는 세밀하게 황룡이 땅에서 삐져나올 지형을 설명했고, 황룡을 공격하는 방법과 황룡의 제일 큰 약점이 어디에 있는 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두딸은 선사로부터 한참 동안 계책을 듣고 난 후, 잠시 선사가 두딸의 손을 놓으며 두눈을 지그시 감고서야 휴우 하고 긴 숨을 내어 쉬었다.
황룡에 대한 두려움과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다짐이 교차하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긴 숨을 내어 쉬게 된 것이다.

선사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 天女와 龍女는 선사로부터 들은대로 조용히 토굴을 나와 와룡암 마당에 쌓아 놓은 대나무 20쪽과 호박돌 20개가 있는 곳으로 가서, 대나무를 다듬고 호박돌을 2개씩 묶어 나갔다. 天女는 대나무를 다듬던 손을 멈추고 허리를 곧추 펴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을 거닐었다.

龍女는 언니의 그런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을 아끼려는 듯 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호박돌을 묶고 있었다.
그믐달은 조용히 구름 사이를 흐르며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고, 별들은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산아래 멀리 서라벌의 불빛이 가늘게 비치고 있었고, 멀리 부엉이가 짝을 찾는 듯 가늘게 울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아버지의 품안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오던 天女는, 오늘따라 부쩍 커 버린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龍女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여서는 아니된다고 다짐했고, 잠시 동안 병환에 누워 계신 아버지와 집안에 딸린 가솔들과 동네의 동무들을 생각했다.

天女는 마음속으로 부처님께 간절한 애원을 드렸다.

'부처님, 시방세계의 모든 악귀를 물리치시고 모든 더러운 것들과 혼돈을 밀쳐 내시고 진리와 자비를 베푸시는 부처님, 이제 우리 두자매, 사악한 황룡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추련선사의 도움을 얻어 큰 싸움을 하려고 합니다. 저희들의 힘이 비록 미약하오나, 부처님의 크신 공덕으로 저희 두 자매를 보살펴 주시고, 음란하여 자신을 더럽힌 황룡을 땅윗세계에서 몰아내게 하여 주십시오. 부처님, 저희 두자매는 오늘 죽을 힘을 다하여 황룡과 싸우겠습니다.
저희 두자매의 힘이 부족하여 황룡에게 육신이 찢겨진다 하여도 그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황룡이 죽지 아니하고 끝없이 땅윗사람들을 이간하고 음란케 하고 탐욕케 하는 것만이 두려울 뿐입니다. 저희 두자매가 몸을 다바쳐 황룡을 땅속세계로 밀쳐낼 수만 있다면, 황룡을 물리침으로써 아버지의 병을 고치고, 세상사람들이 서로 존경하며 고루 정을 나누고 바르게 모여 살 수 있다면 달리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부처님 부처님, 연못 속의 진흙처럼 엉켜 붙어사는 이곳 세상사람들을 어여삐 여기시어, 저희 두자매, 오늘 이 싸움에 거름이 되어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天女는 부처님께 기원을 드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두볼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훔쳐 내리며, 배아래로부터 솟구쳐 오르며 타오르는 듯한 강한 열기에 흠칫 놀랐으나, 龍女가 손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이내 龍女에게로 다가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다.

두 자매는 준비를 마치고 토굴로 들어갔으나, 역시 선사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따뜻한 온기만 남아 있을 뿐 선사는 보이지 않았고 토굴에 붙어 있는 지장보살상만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두 자매는 지장보살상에 삼배를 올리고 대나무와 호박돌을 챙겨 선사가 일러준 곳으로 조심스럽게 산을 올라 제법 너른 터가 있는 곳까지 나아갔다. 선사가 자시가 끝날 때쯤 그믐달이 지기 시작하고 황룡이 땅에서 삐져 나올 것이라고 일러주었으므로, 두 자매는 숨을 죽이고 잠시 동안 정막속에서 시간을 기다렸다.

스잔한 가을바람은 검은 밤 공기를 안고 두 자매의 볼을 스쳐 지나갔고, 이제까지 산 아래에서 따뜻한 밥을 먹으며 홍시와 군밤을 먹던 기억은 마치 먼 옛날의 일처럼 생각되었고, 산 아래와 이곳 사이에는 마치 넘을 수 없는 깊은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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