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천룡사지를 다녀와서 (4)

 천룡사지를 다녀와서..(4)





(天龍寺의 꿈4)

그날 天女와 龍女가 황룡과 벌린 사투에 대하여 말을 이어가기 전에 여기에서 일요일밤 남산을 다녀와서 꾼 꿈에 대한 얘기를 하겠다.

이제까지 내가 옛날 신라의 6두품 김재륭과 소현낭자, 추련선사를 등장시킨 것을 실로 일요일 밤의 꿈으로부터 연유된 것들이고 그 이름 자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남산을 내려와서 구정이 집에서 침대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는 바로 일어나 부산으로 차를 운전해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도 집중해서 운전을 할 수가 없었고 그저 앞차의 불빛만을 보고 천천히 따라서 운전을 했다. 경주를 떠나기 전에 기침약으로 준 구정이의 한방이라는 약물 한쪽을 먹은 때문이었을까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서도 기분은 가라앉지 않았고 가슴에 지긋이 눌러 오는 막연한 압박감을 느낀 채 침대에 누웠다.

리모콘을 더듬어 찾아 씨디 플레이어를 작동시켰다. 요사이 늘 듣고 있는 윤이상의 '풀룻 연주자를 위한 연습곡'. 기묘한 피리소리 같기도 하고, 새벽 멀리 절에서 범종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갑자기 피리를 뚫고 사람의 쉰 목소리가 박차고 나오는 듯한 연습곡이다.

잠깐 잠들었던 것일까

온통 암흑으로 둘러싼 것 같은 산중. 등에 아이를 업고 어두워서 어떻게 내려가나 전전긍긍 대며 산길을 더듬어 내려오려는 데,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붉은 불기둥이 산등성어리를 따라 산 아래쪽으로 내려꽂히면서 엄청난 굉음을 내고 폭파했다.

天女는 그믐달이 지기 시작하는구나 생각하는 순간, 문뜩 발아래에서 뜨거운 불기운이 솟구쳐 오르는가 싶더니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힘없이 튕겨져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다.
발아래를 내려보니, 황룡이 땅을 삐져 나와 벌써 머리를 휘젓고 있었고, 거대한 몸뚱아리는 산등성어리에서 아래쪽을 향해 꿈틀거리며 땅을 헤쳐 나오려는 참이었다.

순간, 눈을 뜨지 못할 정도의 환한 빛이 황룡의 눈앞에서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황룡도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듯 더욱 요동치며 몸통을 꿈틀거렸다.

天女는 황망중에도, 황룡이 땅에서 삐져나오면 선사가 흰 도포를 휘날려 황룡을 멈추게 할 것이니 그 때를 놓치지 말고 뒤트는 황룡의 목덜미 비늘 사이에 대나무를 꽂으라는 말씀을 생각하고, 허우적거리면서도 맹렬하게 황룡의 뒷덜미를 향해 대나무창을 내리꽂았다. 비늘 사이에 정확하게 대나무창이 내려꽂혔고, 황룡은 또다시 예기치 못했던 공격을 받고 입에서 뜨거운 불기둥을 뿜어내었다.

龍女는 언니가 갑자기 하늘로 뛰어오른다 싶어 악 ! 하면서 언니를 쳐다 보다가 순간 눈앞에 환한 빛이 터지고 이어서 황룡이 꿈틀대며 불기둥을 내뿜는 것을 보고서야 제 정신을 차리고, 선사가 미리 일러준 대로 2개씩 묶은 호박돌을 휘휘 돌려 황룡의 눈알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황룡이 머리를 휘저으며 꿈틀대는 바람에 호박돌은 황룡의 머리 부근으로 휙 소리를 내며 날라갈 뿐 눈을 맞히지는 못했다.

龍女가 다시 호박돌을 던지려는 데, 황룡이 龍女를 향해 불기둥을 뿜어 내었고, 龍女는 채 호박돌을 잡기도 전에 불길에 쌓여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天女는 동생이 불길에 쌓여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며 마지막 대나무 창을 황룡의 목덜미에 내리꽂았다. 벌써 20개의 대나무창을 다 소모하여 가는데도 목덜미 비늘사이에 정확하게 내리꽂힌 대나무창은 불과 2개에 불과했다. 天女는 자신도 모르게 야--아--앗 기합을 주면서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오는 황룡의 목덜미 비늘사이를 정확하게 겨냥하여 마지막 대나무 창을 내리꽂았다.
약간 비스듬히 꽂히긴 했으나 마지막 창은 비늘을 피해 황룡의 목덜미에 내리꽂혔고, 天女는 온 힘을 다해 대나무창을 밀어넣었다.

황룡은 목덜미에 올라타고 창을 찌르는 天女를 떨쳐 내기 위해 더욱 몸부림을 쳤으나 아직 몸통이 온전히 땅에서 삐져나오지 못한 탓인지 머리와 목덜미 부분만이 고통을 참지 못한 채 바둥거리는 모습이었다. 마지막 일격은 황룡의 눈앞에 터졌던 흰빛이 있던 곳에서 날아왔다. 흰빛은 맹렬한 속도로 天女가 대나무창을 내리꽂은 곳으로 날아와서는 대나무창과 부딪치자 눈부시게 흰 빛을 맹렬하게 발하더니 이 세상을 모두 날려 버릴 것 같은 큰 소리를 내면서 폭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등에 업힌 아기를 돌려 안은 채 갑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싸움을 숨어 보다가 마지막 대나무창의 폭발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고, 나무가지들은 불이 붙어 훤히 타고 있었고, 붉은 핏덩이 같은 것들이 온통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용과 싸우던 처녀들이 어떻게 되었나 고개를 들어 산길을 내려가려는데, 발에 무엇인가 탁 부딪치면서 앞으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윤이상의 풀룻 연주자를 위한 연습곡은 되풀이해서 연주되고 있었고, 시간은 새벽 3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子時가 끝나고 丑時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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