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천룡사지를 다녀와서 (5)

 천룡사지를 다녀와서..(5)

(天龍寺의 꿈5)

(꿈에서 깨어나 거리를 보면서-김재륭의 독백)

마지막 피던 담배꽁초를 찾아 물고 거실의 창가에 섰다.
멀리 가로등 행렬 사이로 차들이 맹렬히 달리고 있었고, 지나가는 대형화물자동차의 빠른 소음이 간간이 들리고 있었다.
노란색이 곁들여져 있는 붉은 가로등 행렬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니, 산 전체에 깔려 있는 것 같던 붉은 핏덩이와 불타고 있는 나무가지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산은 다시 고요한 정막속에 빠졌다. 붉은 핏덩이들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별빛은 붉은 핏빛을 받은 듯 더욱 붉게 빛나고 있었다.
어느듯 날이 밝고, 김재륭은 씻은 듯이 몸이 깨운하고 상쾌하여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일어난 가솔들이 이런 김재륭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주인어른이 병을 이기고 일어난 모습에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들이었다.

김재륭은 두딸이 서라벌 남산의 와룡암 추련선사를 만나러 갔다는 말을 듣고 채 아침상을 받기도 전에 와룡암을 찾아 나섰다.

김재룡이 노비 둘을 데리고 와룡암에 당도해 보니, 그곳에는 암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조그마한 토굴이 있었고, 토굴에는 지장보살상만이 덩그러리 걸려 있었다.
노비를 풀어 추련선사를 찾았으나 선사를 찾지는 못했고 토굴 근처에서 선사를 모신다는 동자승을 만나 추련선사는 어제 밤 두 낭자와 함께 암자를 떠났다는 말을 듣고 동자승의 인도로 와룡암 뒤쪽으로 난 산길을 올라갔다.

아 ! 이 얼마나 처참한 모습인가 땅은 뒤집혀져 있고, 나무들은 불 타 쓰러져 있고, 주변의 풀섶과 바위들은 붉은 핏덩이를 뒤집어쓴 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노비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이 아득하여 달려가 보고, 김재륭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휘청거리며 땅으로 꼬꾸라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김재륭은 두딸의 시신을 안고 한나절을 통곡하였다. 이 어린 것들이 아비도 없는 이 산중에서 무슨 일을 당하여 이렇게 처참히 죽어 있는가.

귀신은 살아 있는 자들을 골라서 저승으로 데려가면서 어찌해서 나같이 병들어 쓸모 없는 이를 골라 가지 아니하고 이다지도 착하고 여린 딸들을 데려갔단 말인가

김재륭은 동자승을 통하여 두딸들이 여기서 어떤 싸움을 했는지 어쩌다가 이 지경으로 죽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짧은 이야기를 들었고, 추련선사는 지장보살이 현신하신 분이라는 설명을 곁들여 들었으나, 떨리는 가슴과 미어지는 듯한 아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살아있는 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하늘과 땅과 바람들아 들어라 ! 도무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땅위의 세상에서 땅위의 것들이 서로 살아가고 땅아래에 세상에서 땅아랫 것들이 서로 살아가며 땅 높은 세상에서 땅 높은 것들이 서로 살아가야 하거늘 어찌해서 땅 아래의 것이 땅위의 것을 미워하고 어찌해서 땅 높은 곳의 것들은 땅위의 것을 가지고 싸워야 한단 말인가
미천한 것은 본디 미천하더라도 그들끼리 서로 정을 나누며 서로의 법을 정하여 이치를 따지며 살고, 높고 고귀한 것들은 본디 고귀하여 그들끼리 서로 사리를 분별하여 살아가야 하거늘, 어찌해서 높고 고귀한 것을 가지고 미천한 것들의 정을 따지고 이치를 가려 시행하려 하는가
바람이 바람끼리 서로 갈 길을 정하고 서로 부딪치기로서니 우리 미천한 세상사람이 어찌 이를 간섭할 것이며, 물이 물끼리 서로 자기의 터전을 정하고 서로 싸워 물길을 내어가더라도 어찌 우리 세상사람이 그들의 잘잘못을 가리고 나무라겠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땅아래의 미움이 땅위의 세상에까지 미치고, 어찌하여 땅아래에서 싸워야 할 것들이 땅위의 인간들을 불러 내세워야 한단 말인가

음란함이 다 무엇이냐
시기함이 다 무엇이냐
또 탐욕함이 다 무엇이냐

그것은 본디 세상사람들이 그들의 정을 나누며 이치를 따져 살아가는 또 하나의 그릇이거늘, 어찌해서 땅높은 곳의 것들은, 높고 고귀한 것으로 이를 탓하고 이를 나무라고 또 그것으로 세상사람을 징벌하려 하는가

아비로부터 날숨을 내어 받고, 어미로부터 들숨을 이어받아 진흙 같은 우리 목숨, 부질없이 살다가 또 부질없이 티끌 되어 바람에 날린다 해도, 진흙끼리 몸을 부벼 음란하다고 해도, 티끌끼리 시기하여 서로 부딪친다 해도, 하잘 것 없이 탐욕함이 덧없는 것이라 해도, 그리하여 그들은 살고, 또 그리하여 그들은 죽어 가거늘, 높은 곳의 이들이 어찌하여 음란하다 하여 세상사람의 몸을 가두고, 어찌하여 시기하고 탐욕한다 하여 채찍을 드는가

그것 또한 온전히 그들의 몫이고, 또 온전히 그들의 운명이거늘,

아, 원망스러워라 하늘은 하늘의 몫으로, 땅은 땅의 몫으로 그렇게 억만년을 지켜 왔기에 이렇게 천지만물이 제 자리를 틀고 서로 서로를 알고, 그렇게 살아왔건만, 이다지도 약하고 어린 것을 내몰아 땅아래의 법도까지 세우려 했는가 우리 천녀, 우리 용녀 어디 가서 다시 만나, 아비가 아비로, 어미가 어미로 제할 도리 다해 보고 살아본단 말인가

담배꽁초가 다 타 들어가 손끝이 화끈거리고서야 김재륭의 애끓는 탄식으로 가득찬 내 마음은 조금 진정을 되찾았다.

죽음의 세계를 탐사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타나트노트'의 첫머리에서 적고 있는 말이 화두처럼 되살아났다. "단 한순간도 끊이지 않는 효과음처럼 죽음은 언제나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구나 온갖 몸짓이 끝나고 나면 자기의 소멸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고뇌 앞에서는 모든 즐거움이 물거품이 되었다.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을 알기에 인간은 진정으로 느긋할 수 없으리라" 살고 죽는 것이 다 무엇인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선은 정녕 어디에 있는 것인가 깨어나 밤불빛을 바라다보는 내가 진정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인가 딸을 잃고 탄식하며 하늘과 땅을 원망하는 김재륭이 진정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아닌가

가을 맑은 일요일의 평안했던 天龍寺址는 아직 잠들지 못한 채 끊임없이 내게 그 역사와 그 아픔을 전해 주고 있는데, 무심한 아이들은 天龍寺址 우거진 풀섶에서 대나무가지 주워 깔깔대며 놀건만, 그 곳 대나무숲은 아직도 아픈 가슴 식히지 못하고 잊혀진 역사와 그 아픔을 따라 울길 바라고 있는데, 멀리 붉은 가로등 행렬은 스잔하게 가로누우며 내게 안식하라. 안식하라. 소곤거린다.

마치 엉덩이를 걷어올린 매춘부의 아랫도리를 보던 때처럼 쓸쓸하게 저 거리에 나란히 누워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 생명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엉커러진 마음을 쓸어 내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제는 평안히 잠들기를 기원하면서, 이제는 김재륭의 탄식도, 밤거리의 스잔함도 모두 잊혀지기를 기원하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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