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 벽면의 아난다와 라후라 상

 사촌동생과 아들인 두 제자상


석굴암의 부조상의 10대 제자상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촌동생인 "아난다"와 아들인 "라후나"상을 소개합니다.





먼저, "아난다"상 입니다.
"아난다"상은 석굴암 본존상의 바로 뒷편에 있는 11면 관음보살상의 왼편(11면 관음보살상을 마주 보았을 때 왼편)에 있습니다.




"아난다"라는 말은 환희, 기쁨을 뜻합니다.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버지 정반왕(淨飯王)의 형제인 곡반왕(斛飯王, 또는 甘露飯王이라기도 합니다)의 아들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시던 날, 아난다의 아버지인 곡반왕가의 심부름하는 아이가 정반왕(淨飯王)에게 와서 당신의 동생이 아들을 낳았다고 전하자, 정반왕은 크게 기뻐하며 "오늘은 행복한 날이다. 기쁜 날이다"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기쁨" 즉 "아난다"로 하였다고 합니다. 불경에는, 아난다의 용모가 뛰어나게 훌륭하여 단정하며 마치 맑고 깨끗한 만월(滿月)과 같고, 푸른 연꽃과 같으며, 몸에서 맑은 빛을 발하는 것이 꼭 명경(明鏡)같았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아난다는 출가후에도 많은 부녀자들로부터 유혹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나, 여인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여, 부처님의 이모인 고오타미(Gotami,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부처님을 낳은 후 7일만에 사망하고, 어린 고타마는 그 후 이모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가 여인으로서 출가(出家)를 청했을 때 이를 허락하지 않는 부처님을 설득하여 그녀의 출가를 성사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수능엄경"에 의하면, 아난다는 탁발을 하던 중에 홍등가의 여인으로부터 유혹을 당하여 그 주술에 마음이 혼미하여 마침내 옷이 모두 벗긴채 음난함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때 석가모니 부처님은 천안(天眼)으로 이를 보시고, 주문을 외어 옷이 벗긴 아난다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설법하시던 장소에 내려 놓았다고 합니다.

"수능엄경"은 이런 상황에서 아난다가 울면서 부처님께 용서를 빌며 자신의 미혹함을 후회하면서 부처님께 많은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저는 이다지도 미혹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까.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몸안에 있는 것입니까,
몸 바깥에 있는 것입니까.
몸안에 있다면 눈에 있는 것입니까,
가슴에 있는 것입니까
몸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정녕 마음이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아난다는 통곡하며 부처님께 묻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난다는 꾸짖고 아난다의 의문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어려워서 못알아듣겠다고 하면서 그 가르침에 다시 의문을 던집니다. 부처님은 다시 아난다의 의문에 더욱 알기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하며, 그 의문의 어리석음을 가르칩니다.

"수능엄경"을 읽다가 보면, 아난다에게 마음으로부터 따뜻한 정이 갑니다. 아난다는 부처님 성도후 20년이 지난 후 누구든지 한 사람 시자(侍者)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하나하나 자신이 그 역할을 맡고 싶다고 제의하지만, 부처님은 이를 물리칩니다.
부처님은 마음으로 아난다가 그 역할을 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아난다는 주저합니다. 자신에게는 너무 무거운 임무라는 것이 그 이유 입니다.
여러 대중들의 권유로 아난다가 그 임무를 맡으면서 세가지를 스스로 약속하고, 대중들에게 약속합니다.

즉, 자신이 시자가 되더라도, 부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의복을 자신이 받지 않고, 부처님을 위한 식사는 받지 아니하며, 비시가 지난 후에는 부처님을 만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난다는 시자로서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신 탓으로, 부처님 사후 제1결집 때에 부처님이 설법하신 바를 경전으로 옮기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난다는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제자라고 합니다. "열반경"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80세가 되어 스스로 열반에 들고자 하실 때에 그 입멸(入滅)의 날이 가까와졌음을 공포하자, 아난다는 그 이별을 슬퍼하며 며칠동안 슬픔과 괴로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친절하게 훈계하고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하시자 아난다는 슬픔으로 거의 실신할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 후 마하가섭이 늦게 돌아와 다비(茶毘)를 마치고 제자들을 이끌고 왕사성으로 와서 야쟈야타샤트루 왕의 보호아래 삼장(三藏)을 결집하지만, 아난다는 홀로 쿠시나가라에서 머물며 7일간 사리(舍利)를 공양하고 이어서 기원정사에 이르러 부처님의 계시던 자리에 예배하고 엎드려 마지막 공양(供養)을 드린 뒤에 비로소 왕사성으로 가서 결집(結集)에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마하가섭은 아난다가 아직도 어리석음을 끊지 못하였다고 경고하고, 아난다의 다섯가지 잘못을 꾸짖으며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섯가지 잘못이란,
첫째, 여인의 출가를 청하여 정법(正法, 부처님의 직접 가르치시는 기간)을 500세 감축시켰다는 점,
둘째, 부처님이 입멸하시기 전에 물을 찾았는데 이를 가져다 드리지 않았다는 점,
세째, 부처님이 더 오래 계실 수 있었는데 이를 청하지 않아 부처님이 일찍 입멸하시게 한 점,
네째, 부처님의 승복을 접을 때 발로써 위를 밟은 적이 있다는 점,
다섯째,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그 음장상(陰藏相)을 여인들에게 보였다는 점을 들었다.

아난다는 대중에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물러나서 참선이 들고 그날 누워서 머리를 베개에 되기도 전에 크게 깨달아 마침내 아라한(應恭,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할 경지로 완전한 해탈 직전의 깨달은 상태)이 되었고, 마하가섭의 지휘아래 사자좌에 앉아 스스로 경(經)을 결집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석굴암의 "아난다"상은 약간 오른쪽으로 향하여 측면으로 서있는데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띠고 두손을 가슴까지 올려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머리는 둥글고 완만한 세련된 모양이고, 얼굴은 기름하여 잘 조화되어 신선한 수도승의 모습을 명쾌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눈썹도 깔끔한 느낌의 시원한 선으로 묘사하였고, 코와 입, 귀도 단정을 느낌을 주지만 입가에는 양 끝으로 약간 올라가서 전체적으로 해맑은 미소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두손을 단정하게 모아 양쪽의 손가락끼리 깍지를 낀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몸매는 약간 호리호리한 편이지만 단단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가사는 왼쪽 팔쪽으로 옷자락을 넘기고 있으며, 목뒤의 깃은 유별나게 올려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당시 조각자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부분 중의 하나이며, 딱딱한 느낌의 가사를 입은 자세를 표현하면서 이렇게 목뒤의 깃을 바짝 치켜올림으로써 아난다의 멋있는 모습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난다가 향해 선 방향은 관찰자가 석굴암 본존상의 오른쪽 무릎쪽에 서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한 듯하며, 아난다 부조상을 향해 서서 보이는 부조상들 역시 하나의 일관된 인상을 주도록 배렬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아들인 "라후나"상을 소개합니다.
오른쪽의 상(像)은 부처님의 아들인 "라후나"상입니다. "라후나"상은 석굴암 본존상의 바로 뒷편 11면 관음보살상의 오른쪽에 있습니다.

"라후나(Rahula)"라고 함은 "장애"를 뜻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2년전에(異說있음) 라후나가 태어나자, 석가모니 부처님는 "장애가 생겼으나, 계박이 생겼구나" 하였고 하여 그 이름이 "라후나"라고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견해로는 "라후나"가 태어나던 날 월식(月蝕)이 있어 그 이름을 "라후나" 즉 달빛이 장애를 받는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후 7년만에(혹은 6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귀환하셨을 때, 탁발하며 돌아다니는 석가모니를 보고, "라후나"의 어머니인 "아쇼다라"는 "라후나"에게 "저 분이 너의 아버지란다. 어서 빨리 가서 재산을 받아오너라.
자식은 누구나 자기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나눠받을 권리가 있단다"라고 하자, "라후나"는 석가모니에게 다가가 "아버지, 제게 재산을 나눠주십시요"라고 거듭해서 청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무 대답없이 교외의 니그로오 사원으로 돌아가서, 제자인 사리불을 불러 이를 상의하고, 사리불에게 부탁하여 아들인 "라후나"를 출가시켰다고 합니다.

그때 "라후나"의 나이 15세였고, 교단내 최초의 사미(沙彌)가 되었습니다. "라후나"는 아직 비구로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전에 비구와 같이 침식을 같이 하였고, 부처님으로부터 제지를 당하자 그후부터 뒷간에서 잠을 잤다고 전하며,
또 어떤 때에는 사위국의 경박한 무리들로부터 매를 맞아 목에 피가 낭자해진 일도 있었는데, 자비심으로 이런 곤욕을 잘 참아넘겼다고 합니다.

또 라후나는 희롱하고, 웃고 쓸데없는 말을 하다가 부처님으로부터 훈계를 받은 일도 있는데(중아함경 제3 羅云經), 이런 이야기들은 라후나가 매우 인욕(忍辱)을 잘 해내고, 또 한편으로는 크게 계율을 존중하고 엄수하는 좋은 본보기를 보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증일아함경 제3 제자품에 의하면, 금계(禁戒)를 깨뜨린 일이 없고, 독송(讀誦)을 게을리함이 없기는 라후나가 제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라후나를 밀행제일(密行第一)의 제자라고 꼽습니다. 밀행이라고 함은, 은밀히 자신이 지킬 것을 잘 지켜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석굴암의 "라후나"상은, 정면을 향한 입상으로 왼손을 주먹을 쥔 채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들어올려 옷자락을 잡고 있습니다. 얼굴은 둥글고 원만한 형태이고, 눈부분이 오목해지면서 상대적으로 빰이 크고 턱은 약간 길고 갸름한 모양입니다.

두 눈은 가늘면서 작고, 코와 입, 귀도 알맞게 표현되었고 입가에는 자비로운 미소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상체는 짧고, 하체는 길게 조각되었고, 통견한 가사는 오른쪽 어깨를 살짝 걸치면서 끝자락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습니다. "라후나"상에 대해서는, 중국의 당나라 선월(禪月)대사가 그린 10대 제자상을 보고,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쓴 찬(讚)이 있는데, 석굴암의 "라후나"을 보노라면 소동파가 보았다는 10대 제자상의 그림을 그대로 보는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 얼굴문으로 달이 둥글게 떴네
눈동자는 번개불처럼 빛나고,
무서운 모습을 부드럽게 하였네
기쁜 얼굴에 위엄이 서리도다.
용상(龍象)의 모습 물고기와 새가 놀라고
이 한 조각 그림의 몸이 호법(護法)의 성(城)이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