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 금강역사상(힘과 균형의 아름다움)


석굴암의 전실을 지나 비도(扉道)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양쪽으로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있습니다. 금강역사상은 지금도 비교적 잘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 입니다.

금강역사상은 다른 이름으로 인왕상(仁王像) 또는 야차(夜叉)라고도 합니다.

금강역사란 언제나 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합니다.

"근본비나야잡사경(根本毘奈耶雜事經)"에 의하면,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기원정사(祇圓精舍)를 세워 채화(彩畵)로서 장엄하려고 석가모니 부처님께 물었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이 '문의 양쪽에 집장(執杖)의 야차(夜叉)를 만들라'고 하신 것에 유래한 것입니다.






금강역사상에 대한 정식의 이름은 없으나, 일반적으로 왼쪽에서 입을 약간 벌리고 있는 금강상을 '아' 금강역사상이라고 하고, 오른쪽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금강상을 '훔' 금강역사상이라고 합니다.

범어에서 '아'는 첫글자이고, '훔'은 마지막 글자 입니다.

밀교(密敎, 顯敎에 대한 말로서 신비적이며 주술적인 불교를 뜻한다)에서는, '아'와 '훔'이란 바로 인체 에너지의 원형을 뜻하며 이 한 음절에 우주의 본체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다고 여깁니다.

여기에서 '아' 또는 '훔'이란 범어를 그냥 우리 말로 편의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고, 그 본음(本音)은 입을 크게하여 혀를 뜨게한 뒤 입술을 닫아 거의 종이 한장쯤의 틈새를 유지한 채 성대만으로 '아-'라고 부르짖는 것이고, 다시 혀를 뿌리쪽으로 내리면서 혀끝을 향하여 소용돌이식으로 '우-'라고 부르짖으며 입술을 닫아버리는 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은 그 입 모양만으로도 충분히 우주의 실체로 향하는 여러가지 명상의 소재를 제공합니다. 

이제 자세히, 금강역사상을 관찰하여 봅시다. 

금강역사상은 석굴암 부조상 중에서 가장 튀어 나오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머리는 높다란 상투에 둥근 장식이 있는 띠로 묶었으며, 얼굴은 비교적 길고 강인한 인상을 줍니다.

눈은 부릅뜨고 치켜 올려져 있으며, 이마까지 근육이 쑥 올라가 있습니다. 코는 뭉퉁하며 큼지막하고 입에도 단단히 힘을 준 양 입근처의 근육도 잔뜩 긴장되어 있습니다.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있는데, 이는 금강역사가 힘만으로 강인한 것이 아니라 지혜로도 강인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침범할 수 없는 무서운 표정이기는 하나, 아무런 악의(惡意)를 느낄 수 없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금강역사상이 모두 위협적이거나 공포감을 갖게 하는 분노상인데 반하여,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불법을 수호하는 위대한 힘을 표현하면서도 자비를 바탕으로 상징적인 힘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이러한 조상방법은 신라인들의 섬세한 표현으로만 가능하였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상체는 벗은 상태이고, 어깨뼈가 불쑥 올라가 있으며, 가슴힘살이 힘차고 강인하게 솟아 있고, 젖가슴 근육도 불룩 합니다. 허리는 상체에 비교적 잘룩한 편이고, 하체에 입은 옷은 문쪽으로 휘날리고 있으며, 하반신은 비교적 짧으며 잘 단련되어 강인한 인상을 줍니다.

양 금강역사는 각기 문쪽으로 향한 손을 내려서 펴고, 반대쪽 손을 들어서 불끈 쥐고 있으며, 허리는 문 바깥쪽으로 활처럼 휜 상태 입니다.

이는 우리 고유의 무술인 태권도의 기본적인 자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며, 무기는 들지 아니한 채 장법(掌法)과 권법(拳法)으로 문을 향하여 강인한 힘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허리에 두른 옷이 문쪽으로 휘날리게 함으로써, 이 상(像)은 가만히 정지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일순간에 힘을 모아 문바깥쪽으로 향하여 허리를 튀기면서 문을 향하여 강인하게 경계를 취한 것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이 금강역사상은 석굴암의 입구에 양쪽으로 들어선 팔부신중의 조각상이 비교적 거칠게 표현된 것에 비하여서도 월등하게 균형감과 조형미를 갖춘 것입니다.

금강역사상은, 상체와 하체의 길이가 거의 비슷하게 조각되어 있어 신체적인 불균형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부적이라든가 주술적인 상징물에 대한 회화나 조각이 가지는 일반적인 특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잡귀를 물리치고 사악한 정기를 내쫒는데에는 조화롭고 균형있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균형잡히지 않고 조화롭지 못한 기괴한 모습, 어쩐지 그로테스크한 모습이 오히려 주술적 효과를 높히기 때문입니다.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의 신체비례관계는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주면서도 전체적으로 균형이 깨지지 않는 묘한 비례의 균형을 느끼게 합니다.


금강역사상의 또 한가지 특징은 암좌와 발부분의 처리 입니다.

금강역사상은 다른 부분은 비교적 자세히 조각되어 있으나, 발부분은 '아' 금강역사상의 오른쪽만 발가락이 표현되어 있으나 다른 발은 모두 앞부분이 뭉퉁하게 처리된 상태이며, 금강역사상이 딛고 선 암좌(岩座)의 돌출 부분도 매끄럽게 마무리되지 않고 울퉁불퉁한 그대로 입니다.

이처럼 발가락의 일부가 생략되고 암좌의 돌출부분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야말로 제작자의 깊은 의도가 담겨져 있는 훌륭한 착상으로 보입니다.

발가락의 앞부분이 뭉퉁하게 처리됨으로써 오히려 금강역사상 전체가 벽면으로부터 앞쪽으로 스며나오는 듯한 인상을 주며, 그래야만 암좌의 울퉁불퉁한 처리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만약 발가락이 모두 세밀하게 조각되었다면, 딛고 선 울퉁불퉁한 암좌와는 어딘지 어색한 모습이 되고, 암좌의 울퉁불퉁한 처리로써 전달하려는 자연스러운 강인함이 단절되는 느낌을 줄 것입니다.



이러한 금강역사상은 비슷한 시대의 중국 운강석굴에 있는 금강역사상과 비교할 때 그 작품으로서의 우수성도 돋보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 후대의 금강역사상 조각이나 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힘찬 인상과 세밀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힘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위압적이지 않고, 온갖 잡스러운 것들을 가볍게 제압하는 기세가 느껴지면서도 한편 다정한 느낌을 주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엄격한 인상을 주면서도 부드럽게 주변을 에워싸고 안도감을 주는 평온한 느낌은 운강석굴의 금강역사상과 비교하여 보면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음은, 통일신라 시대를 살던 선인들의 깊은 신앙심과 고상한 미적 감각 그리고 균형감 있는 표현력의 깊이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그로부터 천년이 지난 시대에 살면서 어쩐지 왜소해지고 자괴감에 빠져 있는 듯한 우리네 후손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어느때 한번 석굴암 유리문에 가까이 서서 오랫동안 이 금강역사상만을 관찰한 경험이 있습니다.

자세히 관찰할수록 금강역사상이 주는 역동적인 힘과 강한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으며, 그렇게 한참을 섰다가 석굴암 문을 나설 때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불끈 들어가 있고 가볍게 미열이 난 상태를 경험하였고, 이것을 두고 돌로 만던 조각상이라고만 하기에는 참으로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일제시대때의 1차 보수공사시 석굴암 내 바닥에서 금강역사상의 두부(頭部, 56cm), 왼팔(47.5cm), 왼손(19.6cm) 각 1개씩 발견되었는데, 두부상은 전면을 향한 채 입을 굳게 다문고 있으며, 귀부분과 머리의 뒷부분은 일부 손상된 상태 입니다.

이 두부상은 매우 세밀하게 조각된 것으로 당시에 몇번씩 조각하여 실패한 것은 그대로 바닥에 묻어두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며, 지금은 경주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