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불국사, 석굴암 방문기


불국사, 석굴암은 삼국유사에 언급되어 있는 것 외에는 오랫동안 문헌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쓴 글 중에는 불국사, 석굴암 방문에 관한 기사가 몇 개 남아 있습니다. 

李埰(?∼1684)는 1670년(현종 11)에 석굴암을 탐방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기록에는 春三月 好時節에 석굴암으로 찾아가는 여행의 기쁨이 엿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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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1670년) 3월 보름 ……나는 骨窟과 石窟을 보고자 해서 바다 동쪽을 따라 李見台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이른 아침식사를 재촉하고 籃與를 정비하여 골굴과 석굴을 두루 탐방했다. 철쭉꽃은 활짝 피고 신록은 그늘을 이루었는데 탐승의 행차에는 참으로 좋은 시절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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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철쭉꽃이 활짝 피고 신록은 그늘을 이루고 있으니 더 가깝게 실감이 납니다.

또한, 번역 책자가 발간되어 있는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조선시대의 귀한 여행기입니다.



출판사(도서출판 혜안)의 소개글을 옮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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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 예순도 넘은 나이의 선비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1652~1707) 선생은 600일에 걸쳐 전국 사찰을 돌아보고 그 여정을 꼼꼼하게 일기로 기록했다.
그의 한문일기를 번역한 책이 <산중일기>다.
여행 일정을 보면 1차 때는 속리산·지리산·덕유산 등을 주로 다니고, 2차 여행은 비교적 짧은 여정으로 치악산 일대를 다녔다.
3차 여행에서는 금강산 일대를 답사하고, 4차 여행 때는 경북 안동·의성·청송 등지의 서원과 팔공산 주변을 돌아다녔다.
햇수로 3년, 개월 수로 22개월, 총 여행일정 600일이 넘는 대장정이다.
책에는 선생이 여행 중에 들른 300여 곳의 사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그 많은 사찰마다 나름대로의 인상과 환경, 그곳에서 만난 스님들의 이름과 성격, 특징까지 꼼꼼하게 적어놓은 기록열(記錄熱)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 책을 번역한 불교미술사학자 신대현 선생은 전국 800여 사찰을 답사한 경험으로 <산중일기>에 나오는 사찰의 역사와 현재 상황을 주석으로 담고 사진까지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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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時翰은 1688년(숙종 14) 5월에 석굴암을 탐방하고 하룻밤을 유숙한 뒤에 이 절에 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기록을 보면, 정시한은 全州로부터 석굴암을 찾아오는 한 居土를 만나기도 했었는데, 그 거사는 아내와 함께 佛國寺, 石窟庵, 骨窟庵 등을 참배하기 위해 봇짐을 지고 먼 길을 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로 미루어 보면, 이무렵 석굴암이 불국사 등과 함께 명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중일기>는 조선시대의 드문 고사순례 기행일기로 나는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그분이 밟았던 그 길을 그대로 답사해보고픈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1688년 5월 15일자로 나오는 석불사 답사기는 석굴의 원형을 잘 설명해주므로 일부를 인용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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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에서) 불존을 담당하고 있는 국행(國行)이라는 스님과 이야기하며 저녁을 먹고 나니 또 꿀물과 엿 그리고 곶감을 먹으라고 가져오므로 얼마 동안 더 앉아 있다가 안내하는 스님을 따라 석굴암(승방을말함)으로 향했다.

 뒤쪽 봉우리로 오르니 자못 험하고 가팔랐다. 
힘써 십여 리를 가서 고개를 넘고 1리 정도 내려가니 석굴암에 다다랐다. 
암자의 스님 명해가 맞이하므로 잠시 앉아 있다가 석굴에 올라가니 모두 사람이 공력을 들여 만든 것이었다. 
석문 밖 양변엔 큰 돌이 각각 4,5,명의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교묘함이 마치 하늘을 이룬 것 같았다. 석문은 돌을 다듬어 무지개 모양을 했다. 

그 안에 큰 석불상이 있는데 엄연히 살아 있는 듯하다. 좌대는 반듯하고 아주 정교하다. 굴 위에 덮개 돌과 여러 돌들은 둥글고 반듯하게 서 있어 하나도 기울어지거나 어긋난 것이 없다. 줄지어 서 있는 불상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한데 그 신기하고 괴이함을 말로 다할 수 없다. 이러한 기이한 모습은 보기 드문 일이다. 두루 완상하다 얼마뒤 내려와 암자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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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석굴암은 불국사 골굴암 등과 더불어 명승지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이 곳을 탐방한 사람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유람이 아니라, 신앙심을 갖고 석굴암을 참배하기 위해 찾은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승 연담이 석굴암을 참배했던 경우나 아내와 더불어 전주에서부터 석굴암을 찾아왔던 거사도 단순한 여행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남경휘가 쓴 석굴암시 중의 “寂寞觀音佛 奔忙乞福人“ 이라는 귀절은 석굴암에서 참배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