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비례관계,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진실로 우리가 어떤 것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본체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인류는 고대로부터 많은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해답과 그에 대한 반성적인 고찰을 통하여 진정한 대답을 듣고자 했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에서 이데아(이념)는 우주에서 최고의 존재이며, 모든 것의 원형이며, 이데아야말로 최고의 미이며, 그중에서도 선의 이데아야말로 최고의 이데아라고 하였다. 그는 우주의 본질인 이데아를 가장 잘 모사한 것, 가장 잘 모방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비모사적(非模寫的)인 美에 대하여 수학적, 기하학적 형태의 조화야말로 아름다움이라고 하였다. 즉, 악기가 내는 소리의 진동수의 비율과 그 비율이 음높이의 차이에 의하여 순서대로 나타날 때 음계와 선율의 아름다움이 발현되는 것이며, 이와 같은 수(數)의 질서가 천체의 운행이나 인생의 질서를 유지한다고 보았다.

그 후에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의 이러한 견해에 대한 반박과 발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향연"의 저자인 크세노폰은 선(善)한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았다.

선한 것, 유용한 것이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라는 그의 견해는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하여 "쇠똥 망태기도 그것이 독자적인 역할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다면 아름다운 것이다. 황금의 방패도 역할에 맞지 않으면 추한 것이다"고 하여 그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런 가운데 헬레니즘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서"(원 제목은 '건축에 관한 10서')에는 건축의 아름다움에 대한 놀랄만한 관찰결과와 견해가 담겨져 있다.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 B.C. 25년경)의 "건축서"는 당시의 신전, 성곽, 해시계, 기계의 제작에 관한 편람적인 서술을 담고 있으며, 건축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견해를 분명히 전하고 있다. 비트루비우스에 의하면, 먼저 건축의 미는 실용성이나 강도(强度)와는 구별되어 이와 동등한 한 요소로 다루어진다. 

즉, "건축은 강하고, 실용적이며, 아름다움의 원리가 계속 유지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이 세 요소를 병렬적 관계로 제시한다. 건축의 아름다움은 "건물의 외관이 경쾌하고 우아하며, 건물 각 부의 치수관계가 올바른 균제비례를 이루고 있는 경우에 얻어지는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균제비례"(Symmetry)에 대하여,
"신전의 구성은 균제비례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것은 그리스인이 아나로기아라고 부르는 비례에서 얻어진다. 비례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건물의 각 부분과 전체에 일정한 비수를 할당하는 것이며, 이에 의해 균제비례의 법칙이 실현된다"고 하고, 그 균제비례의 실현은 인체의 비례에서 발견된다고 한다(아래 그림은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그린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즉, 인체의 치수는 간단한 비례를 형성하는데,
안면은 턱에서 이마 위 머리카락이 있는 부분까지로 신장의 10분의 1이고,
손바닥은 손목에서 장지 끝까지로 팔길이의 10분의 1이며,
머리는 턱에서 머리끝까지로 신장의 8분의 1이라는 것이다.

또, 인체는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에 들어맞으며, 사람이 손과 발을 펴고 드러누웠을 때 컴퍼스의 선단을 배꼽에 놓고서 원을 그리면 손과 발끝이 이 원주선에 닿는다. 또 양발을 붙이고 양손을 펼치면 정방형이 된다.

그는 자연이 바로 인체를 이처럼 전체적으로 비례에 맞추어 만들었으므로 신전도 이러한 비례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이 비례에 따라 신전 기둥의 배치, 기둥의 높이와 둘레, 그 위에 있는 수평재의 조합을 제시하고 있다.(아래 그림은 아우구스투스에게 건축십서를 바치는 비트루비우스)


비트루비우스는 그의 "건축서"에서 미량변형(微量變形)과 착시교정(錯視矯正)에 대하여 부기하였다. 미량변형이란, 건축물을 구성하는 직선을 약간 만곡시키거나 혹은 수직선을 약간 기울어지게 하는 것이다. 또 착시교정이란 형태가 비뚤어져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미량변형을 가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신전을 건축함에 있어, 기단의 중앙부를 높여야 하는데 그 까닭은 수평으로 만들면 눈에는 오목하게 보이기 때문이며, 기둥은 성긴 곳에는 두껍게, 밀집한 곳에는 가늘게 하고, 모퉁이 기둥은 주위의 탁트인 공간에 의해 더욱 가늘게 보이므로 직경의 50분의 1을 더 굵게 하여야 한다고 했다. 또, 시선이 높아질수록 공기가 엷어져 대상이 명확하게 파악되기 어렵게 되므로 높은 곳에 쓸 구조물은 비례에 얼마간을 더 가산하여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세세하게 미량변형과 착시교정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바, 그의 그와 같은 실험심리학적 건축미론은 실로 정교한 것이라는 데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고대로부터의 미학논쟁에 대하여는 나중에 따로 보기로 하고, 비트루비우스가 제시한 "균제비례"은 실로 석굴암과 불국사의 조형원칙에 비추어 그지없이 정확하게 그 아름다움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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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요네다 미요지는 불국사의 조형물 중 대웅전의 보간, 도리간 길이의 10분의 1로써 석가탑의 1층 기단부의 폭과 높이가 결정된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10분의 1이란 바로 비트루비우스가 인체의 비례관계에서 발견한 안면과 신장의 관계, 손바닥과 팔길이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비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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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대웅전을 이루는 직사각형의 윗변 중앙점을 꼭지점으로 하여 대웅전의 아랫변 꼭지점을 잇는 삼각형을 그으면 그 아랫쪽 꼭지점은 남회랑의 양 꼭지점에 정확하게 일치한다.

대웅전 돌계단의 중앙을 원의 중심으로 하고, 그곳에서 다보탑의 중심을 잇는 길이를 반지름으로 한 원을 그으면, 그 윗쪽은 대웅전을 이루는 직사각형의 윗변 중앙에 일치하고, 석가탑의 중심에 일치한다. 

이는 비트루비우스가 말한 바와 같이 손발을 뻗친 인체가 원이나 정방형에 내접하는 관계를 그대로 실현한 것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생각컨대, 인류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이란 없는 것이고, 오로지 주어진 물질세계가 있으며, 그 물질세계의 비례관계에 익숙해진 눈과 마음이 동일한 비례관계가 내재된 것에서 안정감과 동일감을 느끼며, 거기에서 아름다움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솟아나오지 않겠는가 추론해본다.

이러한 추론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건축을 하는 이에게 있어, 특히 신전을 건축하는 이에게 있어 가장 지고의 임무인, 순례자에게 저절로 아름다움의 감정과 신비함, 엄정함, 자연스러움, 숭고함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공통된 경험에 의하여 발견된 비례관계와 기하학적 구조를 건축물의 조형에 응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관찰을 통하여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생각하고, 천년의 시간을 넘어 당시의 신라인들과 함께하는 감동을 꿈꾸며, 그와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명상'과 '함께하는 감동'을 통하여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고 싶었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서'를 읽고서야,
그가 제시하는 균제비례가 바로 석굴암과 불국사의 조형에 철저히 투영되어 있음을 발견함으로써 한발짝 더 진정한 아름다움에, 진정한 감동에 다가서게 된 것 같아 짜릿한 전율감에 벅찬 마음으로 다시 경주에 갔다. 그리고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사무치게 고마운 뜨거운 감정을 느꼈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아름답지 않은가, 석굴암과 불국사
고맙지 않은가, 그곳에 의미와 신앙을 남긴 선인들이
그곳에서 천년의 시간은 찰라와도 같이 수축되고,
그곳에서 인생의 허무함도 다시 아름다와지는 것이니
찾고 또 찾으며,
만나고 또 만남으로써
온갖 번뇌와 두려움은 불태워지는 독버섯처럼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 빛나는 여여(如如)함 우뚝 서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