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좌경루(左經樓)를 보면서
시절이 수상(殊常)하고 격변하는 때일수록 뜬구름의 그림자와도 같은 헛된 것에서 눈을 돌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명품을 감상하고 그것에서 품겨나오는 향기를 오랫동안 묵상하는 것은 인간을 더욱 품위 있게 만들고 마음에 평화를 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명품이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것이고 그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비추어 그것에 담긴 사상이 바로 우리들 심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일 때에는, 그것에 대한 묵상은 자신에 대한 위대한 각성으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그 명품이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것이고 그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비추어 그것에 담긴 사상이 바로 우리들 심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일 때에는, 그것에 대한 묵상은 자신에 대한 위대한 각성으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흔히 에밀레 종이라고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다시 한번 새겨볼 가치가 있습니다.
8세기를 살던 선인들의 구극(究極)에 대한 염원이 잘 담겨진 명문은 그 첫머리에서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밖을 둘러싸고 있어서 눈으로 보아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고, 아주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어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가설(假說)을 세워, 세 가지 진실(三眞)의 오묘함을 보듯이 신종(神鐘)을 매달아 놓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고자 한다.
(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廳之不能聞其響 是故憑開假說 觀三眞之奧載 懸擧神鐘 悟一乘之圓音)
(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廳之不能聞其響 是故憑開假說 觀三眞之奧載 懸擧神鐘 悟一乘之圓音)
라고 새겨 두고 있습니다.
불국사는 불경에서 설하여진 부처님의 참진리(至道)를 눈으로 보이는 건축물로서 완성하여 놓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불국사의 전각과 건축물에 남아있는 상징과 의미를 탐구하는 것은 바로 가설(假說)을 통하여 진실을 발견하는 중요한 통로를 밟아 가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경주 불국사의 조형물 중에서도 요즈음 마음으로부터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고 있는 곳은 불국사의 좌경루(左經樓)입니다.
불국사 좌경루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돌받침을 두고 있고, 돌받침이 맞물리는 곳에는 단순한 십자형으로 마무리를 한 형태이며, 전각의 건축형태도 매우 단순합니다.
이는 마주보는 곳에 있는 범영루가 그 돌받침에서부터 둥근 안상(眼像)을 다양하게 넣어 화려하고 복잡한 것과 뚜렷하게 대칭되는 것으로서, 이러한 대칭은 화려한 다보탑과 단순한 석가탑, 대웅전 처마에 장식된 봉황과 용머리, 대웅전 내부 기둥에 새겨진 사자와 코끼리상 등에서 뚜렷하게 발견됩니다.
불국사 좌경루는 이처럼 매우 단순한 형태로 축조되어 있는데다가 그 위치마저 불국사 전체 건축물의 한쪽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고 청운교, 백운교에서조차 잘 보여지지 아니하여 그 아름다움을 좀체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불국사 좌경루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즉여(卽如)함에 있습니다.
즉여(卽如)는 모든 인위적인 것이 배제된 무사(無事)함이요, 일체의 유(有)도 아니고 무 (無)도 아닌 무엇인가에 대한 암시이고, 자연 그대로를 내포하는 동시에 완전한 조화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장식되지 않아 조금은 둔한 것 같은 느낌,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조용히 고개 숙이고 고즈넉이 서 있는 모습,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게 본래의 지향점을 잃지 않은 자태,
텅비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자꾸 넘쳐흐르는 견실한 인상,
강대하지도 않고 현란하지도 않지만 굳이 힘을 들여 무엇을 갈구어 내지 않는 가운데서 우러나오는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오랫동안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뜨거운 감동.
이것이 좌경루가 주는 즉여함의 아름다움입니다.
장식되지 않아 조금은 둔한 것 같은 느낌,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조용히 고개 숙이고 고즈넉이 서 있는 모습,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게 본래의 지향점을 잃지 않은 자태,
텅비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자꾸 넘쳐흐르는 견실한 인상,
강대하지도 않고 현란하지도 않지만 굳이 힘을 들여 무엇을 갈구어 내지 않는 가운데서 우러나오는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오랫동안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뜨거운 감동.
이것이 좌경루가 주는 즉여함의 아름다움입니다.
야나기는 민예(民藝)를 주장하면서 우리나라에 깔려있는 무심한 도자기에서 참다운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하고, 조선의 도자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타력의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억지로, 의식적으로, 명품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도자기를 만들어서는 진정한 명품은 만들어지지 아니하고, 명품이란 오로지 무심한 가운데, 아무런 욕심도, 의지도, 무심하여야 한다는 각오마저도 없이 그저 지친 생활 속에서 또 하루의 일과로서, 먹거리가 없어 걱정이라는 아내의 투정을 들으면서 도자기를 만드는 가운데 탄생하는 것이며, 조선의 도자기는 바로 이런 무념의 작업, 무심한 작업의 소산이기에 아름답다고 합니다.
야나기는, 일본의 도자기는 억지로 아름다움을 지어내려는 가식으로 인하여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지겨움, 반복되는 가식의 소산이 되고 말았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야나기는 일찍이 일본의 정토종(淨土宗)에 일념(一念)을 바친 적이 있고, 정토종에서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진언(眞言)을 외우는 외에는 달리 경전을 공부할 것도, 무진 수행(無盡 修行)을 하여야 할 것도 없다는 그 타력의 각성(他力의 覺醒)에 매료된 바 있습니다.
자력(自力)에 의하여, 자각(自覺)에 의하여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무념한 가운데, 무심한 가운데 타력에 의하여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영국의 윌리암 블레이크(William Blake)에 의해서 19세기초에 주창되었던 것인데, 블레이크의 시 'Innocence'는 성경에 나오는 타락 이전의 아담을 'Innocence'한 낙원의 인간이라고 상정합니다.
아담은 선악과(善惡果)를 탐함으로써 신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였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 할 줄 알게 되어 이른바 지혜라고 하는 경험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함으로써 신의 상태, 낙원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고, 타락 이전의 낙원으로 돌아가기 위하여는 선악과를 탐함으로써 얻은 지혜, 인식작용을 제거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 인식, 경험, 분별에 의해서는 오직 선악과 이후의 한계적인 위안만을 거둘 수 있을 뿐이고, 지혜, 인식, 경험, 분별을 멈추는 것만이 선악과 이전의 낙원의 상태, 신적인 아름다움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나기는 블레이크의 이 사상에 매료되어 2편의 책을 썼을 정도이고, 그 사상에 기초하여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만드는 도공들의 무심한 작업, 무념한 작업에서 갈구어진 것이라고 찬미하고 있습니다.
불국사의 좌경루는 고요함과 적막함, 무사(無事)함, 조작되지 아니한(莫造作) 아름다움, 즉여함의 진정한 의미를 조용히 일러주는 훌륭한 건축물입니다.
화엄경과 법화경, 유마경이 건축물로서 온전히 세워져 있는 곳, 불국사에서 좌경루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온전하게 전하는 소중한 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민예 - 보기
화엄경과 법화경, 유마경이 건축물로서 온전히 세워져 있는 곳, 불국사에서 좌경루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온전하게 전하는 소중한 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민예 - 보기